글쓰기의 몸짓, 말하기의 몸짓, 만들기의 몸짓. 사진촬영과 영화 촬영의 몸짓, 식물 재배의 몸짓, 면도의 몸짓,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몸짓. 느낌이 오다가 이게 뭐지? 호기심이 드는 몸짓의 리스트이다. 빌렘 플루서의 저서에 등장하는 각 장의 이름이다. 플루서는 커뮤니케이션 이론 및 미디어 철학의 선구적인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몸짓들(GESTEN: VERSUCH EINER PHÄNOMENOLOGIE)』은 그가 인간의 ‘몸짓(gesture)’을 통해 사회·문화·기술·예술적 현상을 탐구한 독특한 에세이다. 으레 ‘몸짓’이라 하면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표현, 또는 즉흥적이고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떠올린다. 플루서는 이 몸짓을 언어, 기호, 기술 그리고 문화 전반과 긴밀하게 연결된 ‘의미를 지닌 행위’로 바라보았고,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차원의 소통과 실천을 자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조명한다.
『몸짓들』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몸짓’이 단순히 개인적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며, 동시에 시대의 기술·미디어 환경과 결합해 계속해서 재구성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악수나 제스처 같은 일상적 몸짓부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진 찍기’라는 행위, 혹은 악기 연주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퍼포먼스까지 폭넓게 다루어내었다. 플루서는 몸짓을 분석할 때, 그 몸짓이 발생하는 맥락과 이를 가능케 하는 기술·도구, 사회적 제도 등을 함께 살핀다. 이를 통해 ‘몸짓’이 결코 개별적이고 고정된 양식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 문화적 조건이 뒤섞여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역동적 실천임을 제시한다.
특히 기술·미디어와의 연관성은 이 책에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일 것이다. 플루서는 매체 및 기기가 인간의 몸짓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재규정하는지를 예리하게 꿰뚫는다. 오늘의 사회에서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터치(touch)하고, 인스타그램의 릴스를 휙휙 넘기며(swipe) 맘에 드는 것에 ‘좋아요’를 누르는(double tap) 등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누비는 일 등이 새로운 ‘몸짓’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에서 몸짓은 과거와 달리 전 지구적으로 공유되고, 복제되었기에, 해석의 여지도 더 많아진다. 미디어아트 분야에서는 물리 및 가상세계를 다루어내며 그 곳에서의 신체성 및 존재를 탐색하며 이러한 몸짓 그 자체, 또는 몸짓을 통해 연결되는 객체들간의 의미, 이에 연관한 확장 가능성을 탐색한다. 플루서의 이러한 사유는 그 현상을 이해하고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시한다.
이 책은 ‘몸짓’을 철학적으로 탐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몸짓이라는 구체적이면서도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문화 전반을 되돌아보고, 미시적 관찰을 통해 거시적 통찰에 도달하는 것을 시도한다. 플루서는 이 책에서 인류학·사회학·예술이론·기호학 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몸짓’의 상징적·정치적 함의를 폭넓게 드러낸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왜 어떤 몸짓은 특정 사회나 예술 작품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가?”, “몸짓이 매개하는 소통은 어떤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는가?” 같은 질문에 닿는다.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인간과 문화, 기술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여정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 가상현실, 메타버스 등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여기에서 몸짓은 새롭게 창출되거나 새로운 의미가 씌워지고 변환되며 우리의 소통 방식을 바꾸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공유되는 관점은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의미 생산과 창조가 어떻게 재구성되는지 성찰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몸짓들』은 단순한 몸의 움직임에서 시작해 기술과 문화의 교차점까지 아우르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관문 너머를 바라보게 한다. 빌렘 플루서 특유의 예리한 시선과 통섭적 사유가 담긴 이 책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예술적 실천과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aliceon.co.kr 편집장)
개요
제목: 몸짓들
지은이: 빌렘 플루서 (Vilem Flusser)
번역: 안규철(번역), 김남시(감수)
출판: 워크룸프레스
발행일: 2018. 5. 25
규격: 264쪽 | 126 * 189 * 17 mm / 320 g
ISBN: 9788994207971
가격: 17,000원
참고사이트: 워크룸프레스-몸짓들
목차
1장 몸짓과 정동: 몸짓 현상학 연습
2장 기계의 저편에서(그러나 여전히 몸짓의 현상학 이편에서)
3장 글쓰기의 몸짓
4장 말하기의 몸짓
5장 만들기의 몸짓
6장 사랑의 몸짓
7장 파괴의 몸짓
8장 그리기의 몸짓
9장 사진 촬영의 몸짓
10장 영화 촬영의 몸짓
11장 가면 뒤집기의 몸짓
12장 식물 재배의 몸짓
13장 면도의 몸짓
14장 음악을 듣는 몸짓
15장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몸짓
16장 전화 통화의 몸짓
17장 비디오의 몸짓
18장 탐구의 몸짓
부기: 몸짓 일반 이론을 위하여
주석
역자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