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헤일스(Katherine Halyes)는 화학 석사와 영문학 박사 학위를 소유한 독특한 이력을 기반으로 현재 듀크 대학교 문학 및 아트 앤 사이언스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러한 그녀의 통섭적인 학문적 배경은 이 책에서 포스트휴먼을 바라보는 그녀의 독특한 관점을 구성한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라는 제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헤일스는 기존의 인간 주체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개체의 등장이 어떠한 기술적, 문화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이를 위해 포스트휴먼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사이버네틱스 담론의 역사를 살피는 동시에 그러한 맥락을 담고 있는 문학 텍스트를 함께 엮어 과학 텍스트만으로는 조명하지 못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룬다. 이러한 헤일스의 통섭학적인 접근법은 다양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포스트휴먼이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상상하게끔 하며, 이미 포스트휴먼이 된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도록 한다.
새로운 개체의 등장: 생각하는 기계와 인간의 접합
현대 컴퓨터의 개념과 모델을 고안한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 은 1950년 그의 논문인 「계산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을 제안했다. 그 방법인 튜링 테스트는 피실험자로 하여금 컴퓨터로 대화를 나누며 상대가 컴퓨터인지 인간인지 구별하도록 한다. 이때 만약 피실험자가 구별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기계 또한 생각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기계도 ‘지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의식이 인간 신체 없이도 존재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체 소멸의 가능성 혹은 신체와 정신의 분리 가능성은 이후 연구자들로 하여금 물리적 제약과 유한성을 가진 신체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의 이동성과 불멸성을 꿈꾸게 했다.
컴퓨터 시대의 도래는 인간의 의식적 차원이 정보 패턴으로 치환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존재 양식에 대한 인식의 변화 또한 가져왔다. 이를 테면, 한스 모라벡(Hans Moravec)은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운로드할 수 있다면 인간의 실체가 본질적으로 신체화된 행동이 아니라 정보 패턴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신과 신체의 분리에 대한 인식은 서구 철학사에서 이미 플라톤부터 이어져 온 것이지만,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의 등장과 탈신체 가능성은 인간사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인간 주체가 소유하던 고유한 의식적 차원은 이제 기계와 접합 가능하며, 인간의 현존은 정보 패턴으로 부호화되고 출력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지능을 가진 기계가 짝을 이루게 됨으로써 기존의 인간 개념으로 설명 불가능한 새로운 개체, 즉 포스트휴먼이 등장하게 된다.
포스트휴먼과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
헤일스는 포스트휴먼의 등장이 곧바로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해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 모델로 여겨져 온 자유주의적 주체는 타인의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자기 능력의 소유자로, 자아의 자치권과 자유를 강조하며 자기 조직화된 닫힌 경계를 가진다. 헤일스는 포스트휴먼이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해체하는 동시에 강화하는 양가적인 면을 가진다고 보았다. 인간이 지능을 가진 비인간 기계와 접합하게 되면서 자유주의적 주체가 고집하던 자아의 자기-조직화된 경계는 주변 환경과 접해지고 공유하게 되었다. 또한 정보 패턴화된 인간 주체는 여러 다양한 환경에 분산되고 이동 가능하게 되면서 자유주의적 주체가 전제하던 온전한 의미의 소유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탈신체화의 경향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다양한 방법으로 계승하기도 하였다.
사이버네틱스 담론의 장이었던 메이시 회의의 첫 번째 모임에서는 탈신체화를 주요 주제로 다루며, 신체화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사이버네틱스 가설을 정립했다. 인간을 일련의 정보 처리 과정으로 이해하는 가설을 중심으로 이후 사이버네틱스 담론은 크게 세 개의 흐름으로 이어져 왔다. 그 과정에서 신체화의 경향도 흐르며 긴장을 이루었지만, 전자 매체의 발전에 따라 가상성이 더욱 일상 생활에 스며들면서 신체화의 말소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였다. 가령 ATM은 실물 화폐의 가치를 데이터로 치환해 원거리에서도 거래를 가능케 하며, 이때 거래되는 화폐의 형식이 0과 1로 이루어진 전자 신호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물질적 화폐의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인터넷이라는 가상 현실은 이용자들의 실제 물리적 조건을 넘어서 원격 통신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물리적 조건을 기반으로 한 현존이 아닌 정보 패턴을 바탕으로 소통할 수 있게 했다.
헤일스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근대의 합리적 정신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전통에서 신체는 자아의 고유한 부분이 아니라 지배와 제어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헤일스는 이러한 정신과 신체의 이분화와 위계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에서 물질성과 신체성을 추상적인 정보 패턴으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포스트휴먼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해체하지만 신체화보다 인지를 강조하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휴머니즘과 마찬가지다.
신체화된 가상성을 향해서: 비물질과 물질의 변증법
헤일스는 과연 정보가 온전히 신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반문한다. 헤일스는 현존에서 패턴으로의 변화는 바로 그 신체화된 경험과 물질적 상태 때문에 일상생활의 경험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경향이 매우 반어적이라고 지적한다. 가령 우리는 키보드를 조작하며 컴퓨터의 패턴화된 시스템을 받아들일 때, 손가락의 운동 감각을 통해 습관적인 패턴으로 신체에 예화(exemplify)한다. 이처럼 우리는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가상성을 우리의 감각계와 컴퓨터의 직접적인 피드백으로써 경험하고, 이러한 경험이 신체에 예화될 때 가상성은 일상생활의 경험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물리적 신체는 사이버네틱스 회로 안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상성 안에 함께 얽히고 접합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일상 속 수많은 경계가 점차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즉 “새로운 주체는 정보의 비물질성과 정보 과학의 물질성을 이종 교배하여 만들어진다(p.347).” 따라서 헤일스는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가장 건설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정보와 신체가 대립적인 것이 아닌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이로써 비로소 진정한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가 해체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어떠한 포스트휴먼이 되어야 하는가?
헤일스에 따르면, 포스트휴먼의 주체는 “혼합물, 이질적 요소들의 집합, 경계가 계속해서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물질적-정보적 개체”이다. 과학 기술이 발전해감에 따라, 포스트휴먼의 주체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생성된다. 오늘날 인공 지능 기술과 메타버스 기술 등이 점차 정교화되고 상용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새로운 포스트휴먼 주체가 되기 위해, 그리고 이미 포스트휴먼이 된 이 시점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까?
헤일스는 포스트휴먼의 전망이 공포와 쾌락을 동시에 일으킨다고 말한다. 가령 지능을 가진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목시록적 공포가 존재하는 동시에, 포스트휴먼이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이분법적 논리로 구성된 낡은 상자로부터 벗어나와 인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해줄 것이라는 긍정적인 관점도 존재한다. 헤일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써 후자의 입장에 선다. “포스트휴먼은 특정한 인간 개념의 종말, 개별 작인과 선택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는 자율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개념화할 부와 권력, 여유를 가진 극히 소수의 인간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의 종말을 의미한다(pp.502-503).” 덧붙여 헤일스는 진정한 공포는 포스트휴먼이 아니라 포스트휴먼의 자아를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관점에 접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 기계로 대체될 것이란 공포는 사실 제어의 주체로서 인간, 즉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를 포기하지 못했다는 방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포스트휴먼의 관점에서 보면 의식적 작인(agency)은 결코 제어된 적이 없다. 헤일스는 사실 제어라는 환상은 의식, 유기체, 환경이 만들어지는 창발적 과정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무지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 안에는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의 역동적인 관계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시 말하자면 결국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를 형성하는 과정으로써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는 신체적, 물리적 접촉의 공포를 낳았고 이는 비대면 기술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이를 테면 로블록스(Roblox)와 같은 메타버스 플랫폼처럼 비대면으로 소통하고, 심지어 경제활동 또한 할 수 있는 기술이 기업들의 지원을 받고 상용화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신체와 가상 신체에 대한 논의는 다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비대면 기술은 우리를 또 다른 유형의 포스트휴먼으로 변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목차
감사의 글
서문
1장 신체화된 가상성을 향해서
2장 가상 신체와 명멸하는 기표들
3장 정보의 신체를 둘러싼 싸움: 메이시 사이버네틱스 회의
4장 위험에 처한 자유주의적 주체: 노버트 위너와 사이버네틱스의 고뇌
5장 하이픈에서 접합으로: 『림보』의 사이버네틱스 구문론
6장 2차 사이버네틱스: 재귀성에서 자기 조직화로
7장 현실 뒤집기: 필립 K. 딕의 1960년대 중반 소설에 나타난 경계 작업
8장 정보 과학의 물질성
9장 인공 생명의 내러티브
10장 가상성의 기호학: 포스트휴먼의 도식화
11장 결론: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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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연 (앨리스온 수습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