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과 노이즈, 텔레노이아적 유토피아 : 석성석 SUK SUNGSUK

 

Scene #1 기술에 대한 편집증적 사유

일종의 편집증일까.

석성석의 작업은 지속적이고 완고한 의심에서 비롯된다. 불필요한, 어쩌면 매우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이러한 의심은 그의 작업에 있어 본질적 작동 기재가 된다. 그는 과거로부터 매체 실험적 작업을 지속하여 왔다. 때로는 매체 그 자체의 매질[媒質]로부터, 때로는 그러한 매체가 상징하는 의식적 수준에 관한 실험이기도 했다. 그의 작업은 하이-테크놀로지가 아닌 로우-테크에 가까운 것이었고, 디지털적 변환에 도달하지 못한 그것이었다. 이는 다분히 의식적 선택이다. 아직 그러한 변환과 전개를 따라가기에는 이전 기술에 대한 사유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전 기술로부터 현재의 기술을 가늠하고 미래의 기술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 기술의 역사가 말해주는 변치 않는 측정 방식이다. 따라서 최근 디지털로 표상되는 당면한 변화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 또한 이에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를 구성해왔던 연속의 세계-아날로그는 기술 체계이자 우리의 삶 자체를 반영하는 생체적 리듬과 현상이었다. 그러나 물질을 구성하는 원초적 단위가 숫자로 전환되는 순간, 신호는 재매개되었고 연속적이었던 우리의 의식은 분절되기 시작했다. 기술에 관한 편집증적 사유는 이로부터 파생된다. 디지털이 아날로그적 연속의 개념을 분절시킨다면, 분절된 연속은 결국 어떠한 변화를 수반하는가? 분절의 틈에서 우리는 어떠한 것을 잃어버리게 될까? 틈-간극에서 발생하는 그 무엇은 정보인가 노이즈인가?

8mm Vertigo, 2011

Scene #2 의식. 연속과 분절

작가가 개입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틈-간극이자 오래되고 새로운 것 사이, 매개와 재매개를 가로지르고 전유하는 바로 그 지점 말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정보 덩어리들을 노이즈라 칭한다. 분절의 간극에서 만들어지는 노이즈. 우리가 그것을 어떠한 가치 체계 속에서 이해할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미 노이즈는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성석은 과거, <전자 초상>이라는 작품을 통해 일그러진 전자 화면으로 구성된 새로운 시대의 초상을 제안했다. 그것은 결국 분절된 우리의 상[像]이자 시대의 이미지였고, 캔버스를 벗어난 매체로의 이동 그 자체였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분절된 이미지는 디지털 입자처럼 보이지만 본래 아날로그 이미지에서 채집된 매우 연속적인 그리고 의식적인 이미지라는 점이다. 그는 아날로그 매질이 지닌 불연속적 요소를 확대-재생산하여 일련의 노이즈로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을 노이즈로 봐야할 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여기에서 주목해봐야 하는 것은 그가 채집한 노이즈가 작가의 의도 안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노이즈를 발생시킨다. 그것도 매우 매체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의도적 노이즈는 스스로의 범주를 벗어난다. 개념적으로 보자면 결국 비의도적-비목적적-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정의와는 괴리가 있다. 그러나 노이즈에 관한 정의를 결국 정보/콘텐츠에 관한 의도의 존재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자면 작가가 발생시킨 노이즈는 역설적으로 노이즈라 부를 수 없는 일종의 정보 이미지이자 메시지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앞서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왜 그러한 간극에 개입하는가? 스스로의 개입으로 발생시킨 일련의 메시지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트렁크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설치전경, 2014년

Scene #3 아날로그 신호의 단절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일련의 아날로그 TV 수신기들을 선보인다. 아날로그 방송 종료와 함께 폐기 처분된, 용도가 정리된 기계 장치들이다. 전기 신호를 수신하는 장치로서의 TV 모니터[수신기]들은 그 외형적 요소로부터 [기계적 설치물로서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또한 백남준 이후 TV는 상징적 기술 매체[당시에는 하이-테크를, 현재에는 로우-테크를 상징하는]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TV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 장치로서 이해되기 어려운 특성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 TV 수신기의 예술적 차용은 관습적인 맥락으로 이해되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날로그 TV수신 장치들을 모아놓은 작가의 의도는 그 선도[鮮度]를 논하기에 앞서 시대를 사유하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시대적 기술에 대한 의심으로서의 필요-충분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왜냐하면 작가는 TV를 텔레-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본래의 기능적 맥락이 아닌 오히려 그 기능이 정지되고 해체된 유물적 오브제로서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과거로부터 시대를 규정해왔다. 굳이 키틀러[Friedrich Kittler]나 플루서[Vilem Flusser]와 같은 매체 이론가들의 선언적 명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마주하는 기술-환경을 통해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보면 기술이 지닌 도구적-기능적 개념을 통해서만 시대를 사유할 수 있게 되는 도착적 상황에 빠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기술의 도구적-기능적 개념은 결국 기술의 존재 이유를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의 목적성 안으로 옭아맨다. 따라서 기술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우리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종속되고 마는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제시하는 TV 수신기들은 이미 그 목적성에서 스스로의 소임을 다한 퇴역 기계 장치들이다. 그것도 시대적 기술 규정에 의해 강제적으로 혹은 일방적으로 폐기된 상태이다. 정작 폐기된 것은 아날로그 신호 체계이지만 그러한 폐기의 운명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오브제는 아날로그 TV이다. 아마도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러한 TV보다 디지털 평면 TV 모니터들이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다이얼을 돌려가며 신호를 감지하고 수신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은 현재에도 레트로 디자인이란 명목로서 유지되고 있다. 다만 신호를 잡아내는 고유한 프로세스에 대한 시스템적 접근은 전무하다. 이렇게 보자면, 아날로그 TV는 마치 외형만 박제되어 남아있는 멸종한 동물과도 같다.

Scene #4 텔레노이아적 유토피아를 향하여 

이러한 맥락에서 석성석의 시도는 기술에 관한, 혹은 기능적 매체에 대한 반성적 사유로서의 기능을 내포한다. 각각의 TV 수신기는 서로 다른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로부터 신호를 수신하는 모습 또한 각양각색이다. 의도를 넘어 이러한 양상은 우리들의 모습을 투영하는데, 송신과 수신으로 구성된 커뮤니케이션의 몇몇 장면들은 TV 수신기들의 다른 화면, 즉 신호 체계에 대한 해석체로서 이해될 수 있다. 아날로그 신호를 제대로 전달하거나, 독자적 방식으로 신호 체계를 교란시키며, 심지어는 송신된 신호를 절대적으로 단절시킴으로서 각자의 정체성은 오히려 발현된다. 작가는 아무런 화면도 내보내지 않는 모니터의 화면 또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적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개입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던 노이즈들도 자연 발생적 차원으로 놓아둔다. 단지 작가는 그러한 환경을 창조하며 발생의 촉매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미디어 작가이자 이론가인 로이 애스콧은 이러한 기계 매체들로 구성된 사이버 세계에서 후기 생물학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의 네트워킹에 의해 구성된 가상의 의식 공동체로서의 ‘텔레노이아[Telenoia]’를 언급한다. 그의 언급처럼 텔레노이아가 신호 체계를 넘어 의식적 수준까지 연결하는 매체적 커뮤니케이션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유토피아적 개념이라면, 석성석의 작업은 오히려 단절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로부터 야기되는 디스토피아적 의식의 수준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로부터 다시금 기술의 기능적 한계를 사유하게 만드는 역할 또한 수행한다. 따라서 작가의 파라노이아[paranoia]적 접근은 텔레노이아적 유토피아를 위한 선결조건인 동시에 로우 테크에 관한 사유로부터 하이-테크를 향한 선언으로서, 디스토피아적 폐허에서 양분을 얻어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텔레노이아적 사유가 된다.

* 본 글은 2014년 8월 트렁크 갤러리에서의 석성석 작가의 개인전 서문임을 밝힙니다.

글. 유원준 | 앨리스온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