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_TAG 15. SF와 함께 한 여행 3, SF도 순정이 있다, 정세랑 SF 단편선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

‘SF’를 이야기하면 흔히 딱딱하고 차가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를 떠올리기 쉽다. SF를 낯설게 여기는 독자들은 어려운 기술 용어, 과학적 배경 지식과 이론, 음울한 정서 등을 SF 장르에 진입하는 큰 장벽으로 꼽곤 한다. 하지만 정세랑 작가의 SF에는 낭만과 순정이 넘친다. 타임 워프, 괴수, 초인물, 아포칼립스 등 SF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정세랑 소설의 주인공들은 시간 여행 자금을 위해 곡예(?) 공연을 하고, 좀비가 점령한 도시의 옥탑에서 다시 열릴 올림픽을 꿈꾸며 양궁 연습을 한다. 정세랑 작가 특유의 다정함이 묻어 있는 주인공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좌절과 공포에 빠지거나 인류를 위한 무거운 사명감에 고뇌하기보다는 소소한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꿈꾼다. 어둡고 무거운 하드SF에 지친 독자들에게 정세랑 작가의 말랑말랑하고 사랑스러운 SF 단편선,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소개한다.

2010년대 이후 한국 문단계에서는 비주류로 여겨지던 장르문학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대중의 흥미와 기호를 중시하는 장르문학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와 문학성을 갖춘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문학계의 다양성은 더 풍부해지고 독자와의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졌다. 정세랑은 장르 문학에 뿌리를 두면서 소위 ‘문단작가’로, 웹소설가로, 드라마작가로 여러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젊은 작가다.[1] 장르 문학 잡지 《판타스틱》에 단편소설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판타지, SF, 추리 등의 장르 소설을 발표해왔다. 하지만 정세랑의 작품은 ‘본격 장르문학’에서는 조금 비껴나 있다. 정세랑의 SF는 물리학, 천체 물리학, 생물학, 화학 등의 자연 과학에 대한 세부적인 지식과 정밀한 묘사를 바탕으로 하는 하드 SF보다는 캐릭터와 감정에 집중한 소프트 SF에 가깝다.

SF의 정수는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엄격하고 정밀한 묘사에 있다고 믿는 독자들에게 소프트 SF는 사이비 과학이나 판타지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SF의 서사는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전개될 때 개연성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프트 SF는 기술과 논리 너머의 인간의 욕망에 집중한다. 소프트 SF에서 SF의 진정한 가치는 논리적 개연성을 뛰어넘는 직관에서 재발견된다.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는 직관과 통찰력은 기술 진보와 합리성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과 문제를 포착해낸다. 생명윤리에 대한 질문을 던진 메리 셸리의 괴기소설 <프랑켄슈타인>(1818), 전체주의와 획일화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조지 오웰의 <1984년>(1949)과 같은 소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고전으로 읽히고 있는 이유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 정세랑의 통찰은 ‘리틀 베이비블루 필’이란 단편에서 날카롭게 빛난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은 치매 신약으로 개발된 알약 HBL1238이 바꾸어 놓은 미래의 풍경을 그린다. 단기 기억 능력 증진의 효과를 보장하는 작은 파란색 알약은 ‘시험 잘 보는 약’으로, 고문 무기로, 성적 환각제 등으로 이용되며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오염시킨다. 빛나는 기술진보 이면에 인간의 욕망으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넌 선택을 하러 온 것이 아니야. 선택은 이미 했지. 선택을 한 이유를 알아야 해.” 영화 매트릭스에서 아키텍처와 함께 매트릭스의 세계를 지탱하는 프로그램인 오라클은 합리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욕망을 직관하는 존재다. 오라클은 주인공이 내리는 선택의 결과보다 이유에 질문을 던지며 미래를 예언한다.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는 직관과 통찰력은 기술 진보와 합리성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과 문제를 포착해낸다.

정세랑의 SF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성의 역할이다. 기존의 소설을 비롯한 영화, 드라마 등의 SF에서 여성의 역할은 고정적이고 한정적인 주조연의 이미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정세랑의 SF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입체적으로 성장하고(‘모조 지구 혁명기’) 생존을 위해 투쟁하며(‘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과학적 진보를 진두지휘하기도 하며(’11분의 1′) 다양한 욕망을 분출한다. “다양한 욕망을 가진 여성들을 그리고 싶습니다. 욕망의 대상은 자유, 명예, 생존, 신념, 사랑, 치유를 포함하여 온갖 것들이 될 수 있겠죠. 서로 욕망을 가진 여성들이 부딪히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2] 정세랑이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서로 다른 욕망 간의 갈등과 대립 끝에는 ‘이해’가 있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의 대립 상황 가운데 정세랑 소설의 주인공들은 제 3의 미래로 나아간다. 병든 행성은 버리고 떠나야할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다크 투어리즘의 명소로 재탄생하고 괴수와의 전쟁은 공존의 지혜를 모색하게 한다. 이러한 대안이 때로는 비약적이고 무모하게 느껴 지기도 하지만, 이분법적 선택지 가운데서 제 3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위안이 되지 않을까.

 

글. 조한결 | 앨리스온 에디터

[1] 김상훈, “정세랑 작가로부터 듣는 장르작가의 삶… ‘작가로서 계속 새로운 매체에 도전하고 싶어’”, 뉴스페이퍼, 2019.05.23.

[2] 김진수, “정세랑 ‘욕망 가진 여성들 부딪히거나 이해하는 이야기 쓰고 싶어요’”, 여성신문, 2020.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