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아트의 역사적 순간들 I

‘디지털 아트’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 적어도 20세기 후반의 앞서간 기술이 반영된 최근의 예술이라는 느낌일 것이다. 으레 관객이 동참하여 함께 작용하여 완성되는 작품으로서의 상호작용성이나, 영상 또는 작품의 구성부분이 움직이고 소리가 나거나 네트워크와 함께 작동하는 등 디지털 기기로 구성된, 움직이고 반응하는 무언가를 떠올릴 수도 있다. 결국 디지털 아트는 기존의 작품이나 물질세계에서 불가능하거나 하기 힘들었던 그런 가능성의 경계를 흔들거나 무너뜨리고 우리가 가진 제약을 넘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우리들의 문화 활동의 증거와 예시일 것이다. 이런 디지털 아트가 걸어온 자취, 그 시작의 발걸음은 바로 우리 뒤편이 아니라 꽤나 멀리, 오래 전에 찍혀있었다.

1. 정보에 대한 미적 자극의 시작점

* Ernst Haeckel, Kunstformen der Natur, Tafel 85, Ascidiae, unicellular radiolarians, 1899~1904

디지털 아트의 시작을 보려면 어느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할까. 일단 그 대상이 예술이니만큼, 미적인 부분의  시작을 우선 살펴봐야 할 것이다. 디지털 아트의 미적 기초를 찾으려면 예술 영역에서의 모더니즘의 미적 전통을 넘어 서구 과학의 수학적 의식 내에서 깊은 상상력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과학 혁명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그 중에서도 생명 과학에 있어 본질적인 자연의 구조와 패턴에 대한 기본적인 경이는 ‘정보’에 대한 본격적인 미적 자극을 제공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은 1899년 <자연의 예술적 형태> (Ernst Haeckel, Kunstformen der Natur, 1899-1904)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꽤 오랫동안 바다 생물을 채집하고 현미경을 이용해 그 생물들에 대한 매우 세부적인 삽화를 생산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생물의 형상에 대한 정보를 모아 일정한 기준으로 분류했고 이로부터 발견한 형태적 경이로움을 극명하게 표현했다. 헤켈의 그림은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과학언어에 시각적 자극과 즐거움이라는 묘미를 새롭게 더한 객관적 창작물이다. 즉 자연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들로부터 시각적 요소의 분류와 분석, 분해와 결합을 통해 자연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재고를 이끌어낸 작업이다. 디지털 아트는 근본적으로 정보를 다루고 표현하는 예술이다. 과학적 ‘정보’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법칙 외의 또 다른 의미를 찾는 예술적 태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2. 최초의 그래픽 아트

* Ben Laposky, Oscillon 40, 1952, C-type photographic print

자연의 형상과 법칙은 수학적 언어를 통해 정리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하기 힘들었던 광범위한 데이터를 입력, 처리할 수 있는 기술과 이를 행하고 출력할 수 있는 기계들이 발전했고, 이 새로운 기계 장치를 사용해 과학자들은 자연 현상의 더욱 넓고 복잡한 구조와 변화를 매핑하여 정확한 수학적 용어로 자연을 기술할 수 있게 되었다. 곧 이렇게 얻은 새로운 시야와 함께 자연의 패턴과 형태를 다루고 표현하고 싶다는 지속적인 욕망이 발현된다. 미국의 수학자이자 예술가 벤 라포스키 (Ben Laposky)는 이에 근거한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체계적인 시도를 진행했다. 그는 1950년대 초, 자신이 개조한 음극선 오실로스코프의 원형 화면에서 출력되는 수천 개의 우아한 아날로그의 파형을 촬영했다. 그렇게 촬영된 형상은 규칙을 가졌지만 현실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은 몽환적이고 비물질적인 반투명한 빛의 입체였다. 이는 전자와 에너지 장의 변화, 그리고 이동이라는 자연의 보이지않는 이면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허버트 프랑케(Herbert W. Franke)가 칭했듯, 라포스키의 연구는 전자 및 계산 기계에 의한 그래픽 생성의 첫 번째 프로젝트였다. 과학은 점차 시각적으로 변했고, 이 과정을 거치며 과학 실험 과정을 통해 수집된 시각적 정보의 미적 특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펼쳐전 이러한 확장된 전자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 경험을 확장시켰고, 인간의 인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3. 최초의 디지털 아트 작품과 전시

* Michael Noll, Gaussian-Quadratic, 1963, FORTRAN on IBM 7090, printed with Stromberg-Carlson 4020 microfilm-plotter

1965년 뉴욕의 하워드와이즈(Howard Wise Gallery) 갤러리에 굉장히 낯선 이미지가 걸렸다. 한 줄의 선이 두서없는 각도로 꺾이면서 수없는 궤적을 그려낸 이미지들이 설치된 이 전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이 전시 <Computer-Generated Pictures>에 대한 호응은 없었고 팔린 작품도 없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혁신적 기술연구로 유명한 벨 연구소(Bell Lab)의 연구원 마이클 놀(Michael Noll)과 벨라 줄스(Bela Julesz)였다. 1962년, 미국의 벨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놀은 그의 동료가 프로그래밍 중 실수로 만든 버그로 인해 출력된 괴상한 기호를 보고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플로터로 출력된 산산히 흩어진 도트를 보며 나온 “추상예술같다”는 농담에서 그는 어떠한 미적 동기를 찾았다. “미대학생들은 고전회화를 참고하며 자기 고유의 버젼을 만들어내는 수업을 받는다. 컴퓨터도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IBM 7090이 몬드리안의 선 구성과 리폴드의 오르페우스와 아폴로의 컴퓨터 버젼을 만들도록 시도해본다.” 그는 컴퓨터를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바로 <가우스 정방형(Gaussian-Quadratic, 1963)>이다. 부주의로 인해 출력된 깨진 이미지에서 디지털 컴퓨터를 이용한 최초의 그래픽 아트가 태동되었다. 디지털 컴퓨터는 수식 계산기에서 인간과 함께 창작을 행하는 새로운 도구이자 파트너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유사한 시도가 유럽에서도 진행되었다. 1963년 독일 지멘스사의 프로그래머였던 게오르그 네스(Georg Nees)도 STANDARD ER56이라는 컴퓨터를 이용한 이미지 생성 작업을 진행했다. ‘8개의 점을 무작위로 산포시켜라. 그 점을 선으로 이어 닫힌 도형이 되게 하라.’ 알파벳과 숫자로 구성된 이 명령어는 컴퓨터에 입력되어 이미지를 생성했고 그 결과물은 플로터로 출력되었다. 그 결과물은 196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진행된 <Computergrafix>전시를 통해 공개되었다. 이러한 초창기 디지털 아트 작업에서 볼 수 있는 디지털 이미지의 본질은 바로 문자와 숫자,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진 수식이었고 코드였다.

4. 컴퓨터를 이용한 생명 창조 실험, 인공생명예술(Artificial Life Art) 

* Karl Sims, Galápagos, 1991
* Karl Sims, Galápagos, screen shot, 1991

디지털은 0과 1, 이 두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정보이다. 모든 물질을 원소에서 숫자로 치환시킬 수 있는 디지털 개념은 모든 물질적 정보를 비물질적 숫자 체계 속에서 헤아릴 수 있게 했다. 나아가 이제 우리는 실제 공간과 똑같은, 그리고 그 이상의 방대한 가상 공간을 확보했고 현실공간의 제약을 넘어 그 이상의 활동을 행하고 있다. 매체철학자 돈 아이디(Don Ihde)가 밝혔듯 “이제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곳은 인터넷 덕분에 지구 전체로 확장되었고, 우리의 경험은 변형되었으며 시뮬레이션으로 탈체현된 우리 몸을 전송할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고 있다.” 디지털은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용매이다. 사진, 영상, 소리, 움직임을 녹여 모든 것을 한데 아울러 연동하고 표현할 수 있으며 현실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디지털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진화와 생명에 대한 실험이 그렇다.

칼 심스(Karl Sims)의 작품 갈라파고스(Galápagos)가 그 예이다. 심스는 생물공학을 전공한 작가이다. 그는 생물의 성장과 계통진화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와 같은 생명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런 인공생태계와 진화 시뮬레이션에 대한 결과물이 <갈라파고스>이다. 이 작품은 12대의 컴퓨터와 출력화면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컴퓨터에서는 진화 알고리즘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다른 12개체의 가상 유기체를 만들어낸다. 각각의 생명체는 그 근간을 이루는 생명정보, 즉 유전자코드에 따라 계속 성장하고 환경 변화에 근거한 진화를 지속한다. 이 과정 중에 관객의 참여가 이루어진다. 관객들은 각각의 생명체를 보고 가장 인상깊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개체 앞에 서게 된다. 이것은 곧 선택이 되고 이렇게 선택받은 생명체는 계속 생존하여 번식하고 돌연변이를 거쳐 진화를 지속한다. 이 작품은 컴퓨터 안에 구성된 닫힌 생태계 안의 생명체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관객은 생명체의 삶과 진화의 방향성에 자신의 기호에 근간한 개입을 행한다.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 정보가 오가며 이 상호작용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디지털 아트는 디지털 아트 이전의 정보와는 다른 차원에서 정보를 다루고 제시하고 있다. 단순히 정보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이를 해석하고 가공하여 다시 반영하거나 생산하는 새로운 감상과 체험의 태도를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정보를 통해 파악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실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생각케 하고, 그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다.

관련정보
1. Ernst Haeckel
http://caliban.mpiz-koeln.mpg.de/haeckel/kunstformen/Tafel_085.html

2. Ben Laposky
http://collections.vam.ac.uk/item/O187634/oscillon-40-photograph-laposky-ben/#

3. Michael Noll
http://www.computerhistory.org/revolution/computer-graphics-music-and-art/15/228/652
http://dada.compart-bremen.de/item/exhibition/172
http://dada.compart-bremen.de/item/artwork/4

4. Karl Sims
http://www.karlsims.com/galapagos/
https://www.digitalartarchive.at/database/general/work/galapagos.html

글. 허대찬 | 앨리스온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