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mbra, Single channel video with sound, 2024, 11’02” © Heemin Chung
‘Umbra’는 천체가 드리우는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정희민 작가의 신작 제목이자 전시의 타이틀로, 전시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 역할을 한다. Umbra를 서사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정희민 작가는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현대적 존재의 깊은 피로를 성찰한다. 그는 “기술은 단순한 편의성을 넘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도시를 채우는 네온사인, 꺼지지 않는 가로등, 고층 빌딩, 그리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전자기기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 감각을 둔화 시키며 피로감을 유발한다. 특히 경계가 사라진 대도시 환경에서 기술은 시공간 경험을 재편하며, 우리가 인지하기 어려운 급격하고 불연속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정보의 과잉과 빠른 변화는 현대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다.
전시는 이러한 맥락에서 밤낮의 경계가 흐려진 채 화려하게 빛나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일식이나 월식에서 빛을 가로막는 어둠을 뜻하는 ‘umbra’를 대입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작가는 어둠, 단절, 그리고 나아가 죽음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밤과 어둠이 제공하는 단절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정희민 작가는 이러한 현대적 힘이 만들어내는 긴장을 탐구하고 있다. 올해 10월 8일 런던 Thaddaeus Ropac 갤러리 Ely House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은 이러한 감각을 예리하게 전달해 주었다. 인간도, 인공도, 자연도 아닌 제 3의 세계에서 비롯된 물질성이 주는 기묘함은, 작가가 이 전시뿐만 아니라 그의 작업적 경력 내내 일관되게 유지하며 전달한 감각이다.
이를 통해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평면에 머무르지 않고, 조각적 요소를 결합한 회화 작품으로 확장된다. 평면적인 이미지에 미디엄이라는 물질성을 더해 입체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미디엄은 안료의 양을 늘리거나 접착력을 보조하는 역할로 사용되지만, 그는 안료가 없는 투명한 미디엄을 확용해 독특한 입체적 질감을 표현한다. 이를 두고 작가는 ‘투명하면서도 반투명한 물질’이라 설명하며, “육체가 없는 상태”를 은유적으로 나타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 물질을 하나의 ‘막’으로 묘사하면서도 사람의 표피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육체의 부재를 상징하는 동시에, 육체를 암시하는 이중적 의미는 그의 작품이 가진 기묘한 물질성과 정체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흩어지고 사라지고 알지 못함, 열린 입술 사이, 복합매체, 2024, ©Heemin Chung
이 회화 작품들은 전시장 4면의 벽에 배치되어 있으며, 중앙 바닥에는 LED 플랫폼 위에 설치된 조각과 영상 UMBRA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배열은 단순한 공간 활용을 넘어, 작품 간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벽면에 전시된 시적이고 은유적인 제목의 회화 작품들 – 예컨대 ‘흩어지고 사라지고 알지 못함, 열린 입술 사이’, ‘잠자는 새들 – 얇고,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중간적 – 확장된 땅에 새겨지기로 결심한 것은 이미 거기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찾을 수 없음’, 그리고 ‘나는 눈 위를 걸었다. 얼음처럼 얇은 땅 위의 섬뜩한 반사에서 나는 설탕물에 빠진 개미처럼 익사했다’ – 는 죽음, 소멸, 그리고 무(無)를 탐구하는 주제를 암시한다.
<Umbra> 전시전경, ©Heemin Chung
중앙에 위치한 영상 작품 UMBRA와 조각들은 이 회화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하며,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플랫폼 위에 놓인 얇은 젤 미디엄 조각들은 철제 구조물을 감싸거나 매달려 있다. 이 조각들의 물질성, 색감, 그리고 해체되거나 부분적으로 뜯겨나간 듯한 형상은 용암 아래 파괴된 폼페이의 폐허, 그 생명과 파괴의 순환적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플랫폼 위의 작품 Revisited Thinking은 젤 미디엄, 레진, 그리고 철 구조물을 활용해 사람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얇은 젤 미디엄은 아래 드러난 철 구조물, 웅크린 사람의 형상, 그리고 찢기고 손상된 표면과 맞물려, 멈춰진 시간 속에서 육체는 소멸했지만 형체는 복원된 폼페이의 유적들이 떠오른다. 이러한 조각들은 죽음과 재생, 그리고 존재의 경계를 탐구하는 전시의 핵심 서사를 한층 더 강화한다. 이 외에도 타이어, 인체, 나무 등을 연상시키는 이 조각들은 추상적이면서도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Revisited Thinking, 복합매체, 2024, ©Heemin Chung
이 기이함은 작가가 도시를 죽음의 현장으로 상정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장면을 통해 죽음과 삶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공간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작업 전반에서 사물, 자연, 그리고 풍경의 이미지들을 조합하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예민한 신체적 감각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서늘한 새벽, 서울 거리를 산책하며 마주친 사물에서 영감을 얻는다. 새벽이라는 시간대는 도시의 고요함과 차가운 공기의 촉감각적 요소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그가 이 속에서 발견하는 폐기물, 꽃, 조개, 나무껍질, 새 깃털, 자동차 껍데기, 깨진 도로와 같은 소재들은 그렇게 새벽 특유의 시간성과 대도시라는 장소성을 머금으며 그의 작업으로 녹아든다. 이러한 순간들은 시각뿐만 아니라 손끝에 닿는 감촉과 공기 속의 냄새까지도 작품에 은근하게 스며들게 한다.
이러한 소재들은 기능과 소속을 잃고 생명력을 상실한 자연물들로, 그는 이를 재물질화하여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는 이 회화 작품들을 ‘정물화’로 정의하면서도, 물리적 물체와 디지털 이미지가 상호 작용하며 일으키는 반응을 실험해 정물화라는 장르를 혁신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전사와 주조 같은 기술을 통해 디지털화된 물체를 다시 물질화함으로써 복제와 확산의 상상적 공간을 연다’고 설명한다. 기능을 잃은 도시의 폐기물이나 자연에서 얻은 산물들을 디지털 인쇄나 페인팅된 막으로 변환하여 캔버스나 금속 구조물에 결합하는 과정은, 또 다른 방식의 죽음과 재탄생, 그리고 순환과 연결성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작가는 회화와 조각 작품을 통해 물질의 잠재성을 탐구해 왔으며, 이번 UMBRA 작업에서는 죽음에 대한 한국적 철학적 해석과 개입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기존 작업에서 물질성의 확산과 복제, 디지털화와 평면화와 같은 강제적 변형은 손실과 획득, 즉 죽음과 삶을 암시하는 비유적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이미지와 회화 사이의 물질적 개입을 다루며, 3차원 형태가 2차원 데이터로 평면화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질적 손실을 통해 기술적 현실과 물리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탐구한다. 이번 신작에서는 본격적인 디지털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추상적인 페인팅 작업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이미지들이 영상 작업을 통해 구현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추상적 개념이 실질적인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특히 3D 모델링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영상 작업을 감상하기 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신작 UMBRA에서는 이러한 물질적 탐구를 넘어, 작가가 한국에서의 죽음과 관련된 의식을 직접적으로 다루며 죽음과 삶에 대한 더 깊은 사유를 제시한다. 특히, 이번 작업에서는 한국 전통 장례의식인 ‘초분’과 ‘다시래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독창적인 시각적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진도 다시래기는 남도지방의 출상 전야에 상주를 위로하기 위해 펼치는 가무극적 연희이다. 이 연희에서는 한국 남도 지방의 장례문화인 초분이 등장한다. 초분은 한국 남도지방의 장례문화로 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일정 기간 짚으로 만든 가묘(假墓)에서 탈골을 한 다음 뼈만 매장하는 장례법이다. 정희민 작가는 이 두 의식이 연관된 죽음에 대해 조상들이 보여준 반응과 태도에 주목하였다. 전통 놀이극 ‘다시래기’는 맹인 남편을 둔 여성이 중과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임신, 출산 하게 되는 이야기로, 정희민 작가는 상주를 위로하기 위한 이 연희가 ‘왜 조상들이 초상집에서 춤을 추고 농담을 나누며 불경한 상상을 하고, 새 생명에 대해 이야기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이번 작업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작가는 이 전통극을 3D 모델링 기술에 기반한 영상을 펼치고, 진도 다시래기의 가사와 작가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일상을 자막으로 더하여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Umbra, Single channel video with sound, 2024, 11’02” ©Heemin Chung
작품의 3D 캐릭터들이 이 영상의 시작을 알린다. 캐릭터들은 비틀거리는 듯하거나 춤을 추듯, 양팔을 크게 흔들고 골반을 극도로 비틀며 등장한다. 이들의 움직임은 연극적이면서도 지나치게 극적이어서 기이한 느낌을 자아낸다. 진도 다시래기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무대에 오른 뒤, 영상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둠 속 배경이 도시로 전환되면서 전통 장례 의식의 서사가 현대 도시의 구조물과 콘크리트 거리로 재구성된다. 진도 다시래기를 재해석한 이 영상은 배신, 사랑,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라는 기존 서사를 캐릭터 간의 긴장감과 속도감, 그리고 거대한 자연의 개입을 통해 풀어낸다. 이러한 긴장감은 오토바이를 탄 두 인물이 도심 속을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는 장면으로 새롭게 표현된다. 영상의 결말에서는 한 여성 캐릭터가 출산을 앞둔 모습으로 등장하며, 도심 한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은유적으로 그려낸다. 출산이 임박할수록 거리로 밀려드는 거대한 파도가 양수를 연상시키고, 여성 캐릭터들은 밀려오는 물결에 쫓기듯 방향을 틀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이처럼 정희민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서사 전달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작품에는 두 양극적인 요소의 경계를 허물고, 그 경계에 순환성을 부여해 연결하는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다. 이러한 순환적 과정에서 예민한 감각으로 재탄생하는 제 3의 물질성과 이미지가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집중해야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작가가 사용하는 오브제, 미디엄, 그리고 영감의 원천들은 하나의 소재로 등장했다가 다시 다른 형태로 변주되며 죽음과 재탄생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상징적 요소들은 3D 작업을 통해 구체적이고 디지털화된 형상으로 구현되며, 회화를 다루던 방식이 영상 작업에도 적용되어 작가 특유의 예술적 언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 관람객에게는 강한 집중력과 더불어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요구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 놀이극 다시래기가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현대 도시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죽음과 재탄생, 순환과 연결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표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전시는 변화하는 환경과 발전하는 기술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우리의 감각이 이를 어떻게 수용할지 깊이 사유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Thaddaeus Ropac 갤러리에 게재된 정희민 작가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 정보 제목: 정희민 《UMBRA》
일정: 2024. 10. 8. 목 ~ 2024.11. 20. 일
시간: 화, 수, 목, 금, 토 10:00-18:00 / (매주 일요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료
장소: Thaddaeus Ropac, Ely House, London, United Kingd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