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재배치 – LLM 이후,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들

Generated by Google Gemini (Nano Banana 2). Prompted by Daechan Heo, 2026

필자는 AI의 역사를 훑다가 ‘상징주의’라는 단어에서 멈췄다. 거기서 실마리를 잡고 따라가다 보니, LLM 이후 ‘이해’라는 말의 뜻 자체가 조용히 바뀌었다는 생각에 닿았다. 이 연재는 그 탐구의 기록이다. AI 기술을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쓰던 개념들이 지금 어떻게 재배치되고 있는지를 현장의 언어로 풀어보려는 시도이다. 그 여정을 AI와 함께 일하면서 묘한 불협화음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하려 한다. 글은 총 6회로 연재될 예정이다.

AI는 이제 특별한 사람, 특별한 상황의 것이 아니다. 한편 이렇게 빠르지만 별다른 걸림돌없이 사회에, 일상에 정착되고있는 상황에 묘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자. 

큐레이터가 벽면 텍스트를 가리키며 조용히 말한다. “이거 AI가 초안 잡은 거예요. 제가 좀 다듬긴 했는데.” 옆에 있던 작가가 잠깐 표정이 굳었다가 이내 웃으며 넘겼다. 아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여기에서 AI가 쓴 텍스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그 짧은 침묵 속에 있었다.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하지?’ 라는 질문. 그리고 그 질문을 꺼내기가 왜인지 어색한 분위기. 우리는 왜 이 질문을 제대로 못 하고 있나. 우리는 지금 AI에 대해 말은 많이 하면서, 정작 핵심적인 질문은 잘 못 꺼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순간들은 지금 우리 현장 곳곳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요즘 AI 관련 대화를 들어보면 두 종류의 목소리가 반복된다. 한쪽에서는 말한다. ‘chatGPT는 그냥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거야. 이해 같은 건 없어. 통계적 패턴 매칭일 뿐이지’ 라고. 다른 쪽에서는 말한다. ‘근데 저 정도 답변을 낸다면 이해하는 거 아닌가? 결과로 판단해야지.’
필자는 이 두 목소리가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라고 느낀다.

흥미로운 건, 이 논쟁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GPT-3이 나왔을 때도, GPT-4가 나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모델이 훨씬 정교해졌는데 논쟁의 구조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필자는 그 이유가 우리가 틀린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질문 자체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AI가 이해하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확인처럼 보인다. 마치 ‘이 물질은 금속인가 아닌가’처럼 답이 있을 것 같은 질문. 그래서 사람들은 증거를 찾는다. ‘AI가 틀린 답을 냈다’, ‘AI가 맥락을 못 잡았다’, ‘AI가 농담을 이해 못 했다’. 반대로는 ‘AI가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았다’, ‘복잡한 법률 문서를 요약했다’, ‘의료 진단에서 전문의 수준을 보였다’ 같은. 

그런데 이 증거들이 쌓여도 논쟁은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 이건 판정 문제가 아니라 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 자체가 사람마다 다르게 전제되어 있는데, 같은 증거를 두고 다른 잣대로 판단하니 결론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철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두고 ‘개념적 불일치’라고 부른다. 단어는 같은데 그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다른 상태. 그리고 이 불일치가 명확해지지 않은 채 논쟁이 계속되면, 논쟁은 생산적이지 않다. 그냥 각자의 직관을 반복 확인하는 과정이 될 뿐이다.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LLM의 등장 이후, “이해”라는 말의 실제 사용 방식이 바뀌었다. AI 연구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해’의 증거는 주로 내부 구조에서 찾았다. 명시적인 규칙이 있는가, 논리적 추론 과정이 있는가, 의미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해’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LLM을 두고 ‘이해한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주로 행동을 본다. 다양한 질문에 일관되게 잘 답하는가, 맥락을 유지하는가, 새로운 문제를 처리하는가. 내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지만 그래도 결과가 인상적이면 ‘이해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단순히 기준이 느슨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해를 증명하는 방식 자체가 바뀐 것이다. 내부 설계에서 외부 수행으로. 구조에서 행동으로. 이 이동이 사소한 것 같지만, 사실 꽤 큰 전환이다. 그리고 이 전환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은 채 논쟁이 계속되니까—각자가 서로 다른 기준으로 “이해”를 말하니까—대화가 어긋나는 것이다.

다시 그 전시 오프닝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큐레이터가 AI가 초안을 잡았다고 했을 때 작가가 잠깐 표정이 굳은 이유가 뭐였을까. 아마 이런 생각들이 스쳤을 것이다. 이 텍스트가 작품을 이해하고 쓴 건가, 아니면 그럴듯하게 조합한 건가. 그리고 그 둘이 다른 건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 차이가 이 맥락에서 중요한가.

이 질문들은 단순히 ‘AI가 이해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우리가 이해를 어디서 찾느냐의 문제이고, 그 기준을 우리 현장에서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이냐의 문제다. 큐레이션의 문제이고, 비평의 문제이고, 아카이브의 문제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연재에서 ‘AI가 이해하는가’라는 질문에 예스 또는 노로 답하는 대신, 그 질문 자체를 해체하고, 이해라는 개념이 LLM 이후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따라가보려 한다. 그리고 그 이동이 우리의 현장, 기획, 비평, 창작, 아카이브에서 무엇을 바꾸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AI 연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해’와 ‘의미’를 어떻게 설계하려고 했을까. 그 오래된 꿈은 지금 우리의 혼란과 생각보다 깊이 연결되어 있다.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aliceon.co.kr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