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감기는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약하게 다가와 잠시 날카로운 이성을 무디게, 그리고 멍하게 만든다. 이 사건은 평소 직시하지 않았던 다른 것들을 되새기게 만든다. 평소에는 감각치 못했던 코의 간지러움, 몇 콤마, 몇 도도 오르지도 않았지만 뜨겁게 느껴지는 이마나 온몸의 미열, 무거워진 몸, 코안을 흐르는 액체는 갑갑함 이상이다. 이 건강치 않은 상황은 역으로 건강했던 당시의 상황을 과거에서 끌어온다. 그렇게 소환된 두 가지 상반된 상태는 서로를 인식하며 상태에 대한 지각을 강화한다. 인지는 무뎌지고 감각은 예민해진다. 감기는 평소와는 다른 세계를 감각하게 만든다.
전시 제목이자 전시에 포함된 드로잉 작업인 <유령 스친 풍경>은 바로 이런 약한 감기를 유발한다. 들풀 가득한 풍경이지만, 그런 풍경이기에 명확하지도 뚜렷하지도 않은, 무언가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는 흔들거리고 낭창거리고 때론 끊어지는 드로잉의 선과 면은 보는 이들의 단단한 이성의 장벽을 조금씩 조금씩 흔든다. 그렇게 몽롱해진 시선은 의식의 경계와 무의식의 경계 사이에 파문을 만들고 무의식안에 쌓여있는 지난 기억들을 인식의 영역 안으로 넘어오게 한다.
유다미는 작업의 첫 발걸음을 자신의 기억, 그 중에서 자신이 살았던 장소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한다. 태어난 제주를, 유년시절을 보낸 가평을 우연찮은 기회로 찾아갔을 때 기억과 전혀 다른 풍경을 마주하거나 혹은 낯섦뿐인 상황에 놓인 그 시점에 대함이다. 이러한 어긋남을 그녀는 무의식의 꿈틀거림으로 보고 그 무의식의 움직임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그녀의 작업은 무의식의 수면 밑으로 내려간,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기억과 자취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나이테에 새겨진 계절의 흔적이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나이테 밑으로 자취를 감추는, 각자의 시야에서 멀어지지만 그 나이테는 사라지지 않듯, 우리의 기억은 단지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밀려나 떠돌 뿐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무의식을 부유하는 기억은 제멋대로인 흐름에 의해 뭉치거나 이어지고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 의식의 그림자에서 인력을 드리우며 우리의 몸짓과 시선, 그리고 사고를 움직이게 한다. 그녀가 레지던시 기간을 지내며 마주한 제주도의 장소와 연관된 경험을 풀어낸 <비 카인드 리와인드(Be Kind Rewind)>가 그러하다.
<기억지도>는 소리를 통해 자아내는 드로잉이다.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을 연상케 하는 촉각적인 기억의 되새김에 대한 독백은 의자의 촉감과 함께 관객을 마사지한다. 그 기이한 체험은 당사자의 무의식을 건드릴 수 있는 한 가닥의 깃털이다. 관객을 둘러싼 그 간지러움과 부유감은 나를 구성하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기억이라는 축을 건드리고 그곳에 접속할 수 있는 단말기가 된다.
이 여정은 또한 <엔트로포센(Anthropocene)>에 이어진다. 게임엔진을 이용해 관람자가 드로잉으로 구성된 일종의 블록을 이용해 구조를 그려나갈 수 있는 이 게임은 이전 작품 <어바니즘(Uranism, 2012)>을 계승한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엔트로포센. 즉 인류세라고 부르는 이 지질학적인 시대는 인간이 만들어 낸 물건들이 ‘기술화석(technofossil)’으로서 전 지구적으로 연속적 퇴적층을 생성하고 이것이 인간의 시대를 증명할 것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이 설정한 한 시대의 이름이다. 유다미는 게임 엔진에 자신의 드로잉 조각들을 집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조각과 사운드 스케이프를 만드는 일종의 심시티(Simcity)를 행한다. 무의식으로부터 불려나온 공간에 대한 기억인 드로잉들은 디지털 조각이자 사운드스케이프로서 가상의 평면 공간 안에 쌓이며 또 다른 공간을 구성한다. 관객은 드로잉을 포토샵의 도장툴처럼 이용해 그들을 공간 안에 쌓아나가며 그 안을 떠도는 봇(bot)의 움직임을 강제할 수 있다. 봇은 마치 우리의 의식처럼 기억의 블록에게 가로막히거나 유도되면서 펼쳐진 공간을 의식하며 누빈다. 이렇게 형성된 레이어는 지질학 시대 구분처럼 어떤 대상의 자아를 구성하는 일련의 역사적 층이며 동시에 그의 움직임을 강제하는 제약이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그 장소에 닿은 어떤 순간에 대한 감각,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문득 떠올린 단어 하나는 방아쇠가 되어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무의식 안에 잠겨있던 기억을 뽑아낸다. 어떨 때는 이질감이며 또 어떨 때는 진한 향수와 아련함으로 온 몸을 적신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때의 그 장면과 소리와 감상의 증거들이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 기억공간과 기억행위의 변주 실황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녀가 마련한 그 장면과 경험들의 하나 하나가 물리적인 자취인 작품을 통해 펼쳐진다.
우리가 서 있는 오늘은 리스크 사회이다. 모더니즘 이후의 오늘, 세상은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선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존 경쟁이 벌어지며 한번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성장주의 세대에서 생존주의 세대로 옮겨 온 지금, 오늘 필요한 것은 발전에 대한 믿음과 노력으로 보장받는 시스템에 의한 미래와 그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무너지고 깨지는, 앞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담보가 없는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힘. 우울증 약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이다. 모두가 과민하기 짝이 없는 오늘, 외부로부터 도움을 얻기 힘든 이상 그 힘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를 규정하며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또한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기반으로서의 층을 쌓고 다져야 한다. 그 단초 중 하나는 기억을 통해 시작하는 자기탐구일 것이다. 유다미의 방법은 그곳에 있다. 드로잉이라는 방법을 통해 의식과 무의식을 한 곳에 불러 모으는 소환의식이다. 날카롭게 당겨진 이성의 끈을 잠시 늦추고 미열에 취해 의식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그 너머의 기억을 감아올려 나를 단단히 할, 무의식 안 기억을 불러일으킬 약한 질병 ‘감기’이고 그 기억을 내 곁으로 감아올려 나를 지탱하게 만들 행동 ‘감기이다’.
글. 허대찬 | 앨리스온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