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관객의 비의도적 참여가 기입된 인터랙티비티: 제도적 규율과 신체의 작동적 위치를 둘러싼 고찰
이번 연재 기획은 미디어 아트 안에서의 작품들을 장르적 형식으로 구분하여 소개한다. 장르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디지털 미디어 아트에서 기술적 매개가 의미 해석의 예술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아트는 기술적 시스템이 작품의 작동 조건을 결정하기 때문에, 장르 정의는 미디어의 작동 논리에 의해 구성된다. 예를 들어 겉보기에 같은 영상 형식이라도 센서 등에 의해 실시간으로 변화한다면 인터랙티브 장르이고, 규칙에 따라 플레이한다면 아트 게임이다. 장르 구분은 작품을 분석하는 틀이자 해체의 대상이며,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지표가 된다.
여러 장르 중 인터랙티브 아트는 관객이 작품의 작동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따라서 ‘관객’의 위치와 역할을 규명하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을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 관객의 개입을 전제로 작동하는 인터랙티브 아트는 초기에 상호작용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장관에 의존해 왔다. 예를 들어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읽을 수 있는 도시(The Legible City)>(1989-1991)는 관객이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으면 가상의 도시 공간을 탐험할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 기술적 상호작용의 즉각적이고 3D그래픽 반응이 작품의 주된 매력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랙티브 아트는 이러한 기술적 스펙터클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는 관객이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상호작용을 받아들이는 방식, 역할, 신체적 태도가 더 중요해졌다. 그 이유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단순히 기술적 반응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관객과 작품, 공간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비판적 매체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더니즘적 자율성 개념을 떠나, 예술과 일상적 신체 경험 사이의 위계를 해소하는 미학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 전환이 중요한 이유는 작품이 놓이는 전시 공간이 본래 관객과 작품 사이의 위계를 만들어내는 제도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미술관은 ‘완결된 작품’을 제시하고 관객은 그것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인터랙티브 아트는 관객의 신체와 존재 자체를 작품의 작동 조건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이러한 위계를 재배치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1960년대 초기 미디어 아트에서는 관객이 “능동적인 관객 즉 ‘수행적 관객’으로 구성”(김성연, 2012, p.55)되었다. 작가들은 이를 통해 TV와 같은 일방적 소통 매체를 비판했다. 대표적으로 백남준의 <참여 TV(Participation TV)>(1963)는 관객이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지르면 TV 화면의 이미지가 왜곡되는 작품으로, 관객에게 구체적인 행위를 요구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뉴미디어아트, 디지털아트는 소통 구조의 변화로 인해 관객이 작가의 명시적 요구에 따른 물리적 행위를 수행하기보다, 관객의 존재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작품의 작동 조건에 삽입되는 양상을 보인다. 김성연은 이를 “관객의 자동성”(김성연, 2012, p.58)이라 표현했으나, 이 글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비의도적 참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비의도적 참여’란 관객이 특정 동작을 수행하겠다는 의지적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그 존재와 신체 자체가 이미 작품의 작동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관객이 ‘참여하겠다’는 의식적 선택을 하지 않아도, 그저 그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작품은 완성된다. 이러한 비의도적 참여는 관객에게 어떤 위치를 부여하는가? 관객이 참여 여부를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작품의 일부로 기입되어 있다는 것은, 관객의 의지나 선택권이 무시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관객을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작품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 ‘작동적 위치(agency)’를 가진 존재로 재배치한다는 의의가 있다. ‘참여’라는 단어는, 관객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작품 구성에 필수적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비의도적 참여가 예술적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단순히 관객의 존재를 기술적으로 감지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첫째, 관객은 자신이 작품의 작동 조건이 되었음을 이후에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인지 없는 참여는 감시나 데이터 수집과 다르지 않다. 둘째, 이러한 인지는 관객-작품-시스템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단순히 ‘신기한 경험’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기술적, 제도적 구조 안에 위치하는지 사유하게 만들어야 한다. 셋째, 관객의 존재는 작품을 단순히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켜야 한다. 작품의 내용과 의미 생성에 실질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비평가 마이클 러쉬(Michael Rush)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기술 발달에 따라 진화하며, 관객을 작품의 능동적인 참여자이자 “공동 창작자”(Rush, 2005)로 변화시킨다고 했다. 김유나는 인터랙티브 아트를 “작품을 구성하는 행위자의 역할을 감상자에게 제시하는 형식의 예술”(김유나, 2020, p.1)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비의도적 참여가 곧 관객의 완전한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의 존재가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해도, 그 영향의 범위와 방식은 여전히 작가와 시스템에 의해 설계되고 제한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비의도적 참여’가 관객에게 부여하는 것을 ‘자율성’이 아닌 ‘작동적 위치’로 이해한다. 관객은 작품의 필수적 구성 요소가 되지만, 그 구성의 틀 자체는 여전히 작가의 설계 안에 있다. 관객은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작동적 위치를 갖지만, 그 영향력의 범위와 방식은 작가가 설계한 시스템에 의해 제한된다. 관객은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는 있지만, 시스템의 규칙 자체를 변경하거나 거부할 선택권은 갖지 못한다. 이것이 작동적 위치와 자율성의 결정적 차이다. 오히려 이 간극이야말로 현대 기술 사회에서 개인의 조건을 드러내는 비판적 장치가 될 수 있다.
비의도적 참여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작가가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동작을 관객이 따르고 그에 대한 화려한 시각적 반응을 얻는 것은 인터랙티브 아트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여전히 작가가 설정한 규칙과 지시에 관객이 종속되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신 오늘날 인터랙티브 아트는 다음과 같이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인터랙티브 아트는 관객의 존재와 신체가 의지적 행위를 넘어 작품의 작동 조건으로 기입되며, 그 과정에서 관객에게 작동적 위치를 부여하는 예술이다. 이러한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이 ‘완결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관객의 존재 없이는 작품이 작동하지 않거나 의미를 완성하지 못한다. 이는 전통적인 ‘완결된 작품’과 구별되는 지점이며, 관객을 작품의 외부가 아닌 내부로 위치시킨다.
비의도적 참여가 왜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전시 공간이 관객의 신체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해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술관은 제도적 공간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전시는 “권력의 테크놀로지들이 구체화되는 방식”(강정민 & 김동일, 2012, p.151)이다. 미술관은 관람객의 신체에 특정한 행동 도식을 새긴다. 조용히 걷고, 작품에 손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감상하는 등의 규범이 그것이다. 푸코가 말한 ‘생체권력(biopower)’의 개념은 권력이 신체를 직접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스스로를 규율하도록 만드는 미시적 작동 방식을 의미한다. 전시장에서 ‘스스로 완결되어 있는’ 작품들의 공간적 배치는 관객을 수동적 감상자의 위치에 고정시키며, 작품과 관객 사이의 위계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게 만든다.
물론 21세기 현재, 미술관의 권위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었다. 관객들은 스마트폰으로 작품을 촬영하고, 자신의 해석을 SNS에 공유하며, 비평가의 권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의미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것이 제도적 공간의 권력 작동 방식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권력은 더 분산되고 미세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의도적 참여가 기입된 인터랙티브 아트는 의미를 갖는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 관객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작품은 관객을 수동적 감상자의 위치에서 끌어내어 ‘작동적 위치’에 놓는다. 관객은 더 이상 작품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작품의 작동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라파엘 로자노-헤머와 크시슈토프 보디치코(Krzysztof Wodiczko)의 <줌 파빌리온(Zoom Pavilion)>(2015)은 감시 기술과 관객의 관계를 더욱 직접적으로 다룬다. 이 작품은 전시장 내부에 여러 대의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관객의 존재와 공간적 관계를 실시간으로 탐지한다. 카메라는 관객의 얼굴을 추적하여 몇 배로 확대하고, 그 기록을 스크린에 투사한다. 관객은 특정 동작을 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관객의 위치, 거리, 방향에 따라 카메라의 시선과 투사 이미지가 자동으로 변형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작동을 통해 관객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고, 동시에 감시 장치 자체를 관찰하는 ‘부분적 역감시’의 위치에 놓인다. <줌 파빌리온>은 비의도적 참여와 감시 구조를 결합한다. 관객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작품의 작동 조건 안에 포함되며, 카메라의 시선은 그들의 얼굴을 확대하여 공적 시선의 폭력성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관객은 단순히 감시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감시되는지를 목격한다. 이는 감시 권력에 대한 완전한 전복이라기보다는, 그 권력의 구조를 가시화하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장치다.

트레버 파글렌(Trevor Paglen)의 <문어(Octopus)>(2020)는 Bloom 전시에서 선보인 인터랙티브 라이브 스트리밍 설치이다. 이 작품은 감시 기술을 문어의 촉수에 비유하며, 전시장 내부의 카메라가 실시간 영상을 웹으로 송출한다. 원격 접속자는 전시장의 관객들과 작품을 관찰하거나 감시할 수 있으며, 자신의 웹캠 영상을 허용하면 전시장 내 모니터에 송출된다. 이 작품은 ‘누가 누구를 보는가’라는 공적 시선의 구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원격 참여자는 전시의 시각적 구성을 직접 변경하고 삽입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전시장 내부의 관객은 일방적으로 감시당하기만 하고, 역감시는 원격 참여자가 웹캠을 허용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전시장의 관객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문어>는 감시 권력의 균형을 완전히 전환하기보다는, 감시 구조를 가시화하는 데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전시장 관객도 역감시를 선택할 수 있는 형태적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비의도적 참여와 작동적 위치 부여라는 인터랙티브 아트의 잠재력이 더 명확히 구현되었을 것이다. 비의도적 참여가 단순히 관객을 시스템에 종속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에게 그 구조를 인지하고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관객에게 그 구조에 대한 비판적 거리나 개입 가능성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인터랙티브 아트에서 ‘비의도적 참여’의 개념을 고찰했다. 비의도적 참여란 관객의 존재가 의지적 선택 이전에 작품의 작동 조건으로 기입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관객을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작동적 위치’를 가진 존재로 재배치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예술과 일상적 신체 경험 사이의 위계를 해소하는 미학적 전환을 보여준다. 관객은 더 이상 ‘예술 작품’을 외부에서 관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존재를 통해 작품의 의미 생성에 직접 개입한다. 둘째, 제도적 전시 공간 내에서 관객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될 가능성을 연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은 관객 없이 작동하지 않으며, 이는 작품-관객 사이의 전통적 위계를 재구성한다. 그러나 비의도적 참여가 곧바로 관객의 완전한 자율성이나 통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관객의 존재가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해도, 그 영향의 범위와 방식은 여전히 작가와 시스템, 제도적 공간에 의해 설계되고 제한된다. 예를 들어 <줌 파빌리온>에서 관객은 부분적 역감시의 위치를 얻지만, 그 가능성 자체가 작가에 의해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비의도적 참여는 관객에게 ‘작동적 위치’를 부여하지만, 그것이 곧 자율적 통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인터랙티브 아트의 잠재력인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향후 논의는 비의도적 참여와 감시 구조, 그리고 전통적인 관람 방식(산책자적 관람, 교육형 관람 등)의 차이를 더 면밀하게 구분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또한 관객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지, 혹은 그것이 인터랙티브 아트의 목표여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글. 김다하.
Reference
-단행본
Rush, M. (2005). New media in Art. Thames & Hudson.
-논문
강정민, & 김동일. (2012). 미셸 푸코와 미술관에 대한 테제들. 인문연구, (66), 135-160.
김성연. (2012).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의 관객성 연구. 기초조형학연구, 13(3), 49-60.
김유나. (2020). 인터랙티브 아트에서 관객 참여의 예술적 의의에 관한 연구 (Dissertation, 조선대학교 대학원).
본 연재는 2025 광주 GMAP 디지털아트컬쳐랩 리서치랩 ‘아트라이터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