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영상이다. 낯설고 비주류로 인식되던 영상 작품이 어느새 미술관의 일상적인 표면이 되었다. 대부분의 중대형 전시에서 싱글 채널 또는 비디오 작품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낯선 것이 아니다. 비디오 아트를 정리하는 대형 회고전 역시 속속 국공립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광화문을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인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이 시선을 이끄는 곳에 세화 미술관이 있다. 태광그룹이 기존 운영하던 일주&선화 갤러리를 2017년 확장 개관한 이 기관은 현대도시에 대해 산책자의 개념으로 바라본 《원더시티 WONDER CITY》, 도시의 빛과 색에 대한 《팬텀 시티 PHANTOM CITY》 등 현대의 도시와 미디어에 연관된 기획이 선보였다. 시선이 자주 가던 가운데 의미 있는 기획이 눈에 들어왔다. 《세화 미디어아트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광화문 부근에 위치한 흥국생명 빌딩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 중요 장소로 주목받아왔다. 바로 일주아트하우스의 존재 때문이다. 사옥 1층과 지하에 걸쳐 자리 잡은 이곳은 전시장을 비롯해 극장과 스튜디오, 아카이브를 갖추고 전시와 상영에서부터 창제작까지 행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 다기능 문화 공간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2000년 10월 개관 이후 2005년 6월까지 영상문화와 미디어 아트의 발전을 표방하며 전시지원, 기기 및 제작 지원 등의 작가 지원에 나서며 당시 새롭고 실험적인 미디어 및 기술 작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일종의 플랫폼으로서 기능했다. 세화 미술관은 이번 전시가 바로 이 일주아트하우스의 아카이브 자료에서 시작되었으며, 현재 활동 중이거나 앞으로 활동할 미디어 아트 분야의 작가들에 대한 후원을 재개하는 의미로서 그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첫 포문은 유비호의 《찰라찰라 in between 0.013 seconds》, 심철웅의 《없는, 그들 Void Them》, 그리고 박화영의 《비너스 도적단의 극장 VENUS BANDIT THETRE OBSCURA》라는 세 명의 전시가 열었다. 우선 이들의 전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비호의 개인전 《몽유》가 2001년, 심철웅의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바다》가 2002년, 그리고 박화영의 《Drive》가 2003년에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기록 순서로 각각의 개별 작가의 공간 동선이 잡혀 있었다.
유비호, <예언가의 말>, 2018
《찰라찰라 in between 0.013 seconds》 배너를 지나 처음 맞이하는 것은 푸르게 빛나는 스크린이다. <예언가의 말>로 시작하는 유비호의 전시는 공간 전체를 시간의 오르내림이 일관되게 관통한다. 마치 참수를 당한 듯 머리 부분만이 가로누운 중년의 남성은 띄엄띄엄 숨 쉬듯 단어를 내뱉는다. 푸른 톤으로 통일되어 어스름히 빛나는 공간은 현실 너머에 걸쳐 표류하는 연옥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쟁, 살인, 비참, 불행, 비극, 고통, 고뇌, 의심…”에서부터 “칠흑 같은 밤바다를 밀항하려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 해변으로 떠밀려온 아이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한탄들”을 지나 “그리움, 기억, 기다림, 소망, 부활, 희망의 단편들이여, 마음속 내부에 박혀있는 빛의 파편들이어”로 이어지는 그 독백은 죽음에서 지상으로 빠져나온 죽은 자 오르페우스의 은유로서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묵시록적인 서사를 전달하지만, 희망에의 가느다란 끈을 연결한다. 현실의 접점은 끊어졌지만, 다시금 현계하여 부유하는 이 존재는 같은 시간대에 걸쳐있으면서도 어긋나있는 표류자이다. 공간을 채운 빛과 소리를 통해 이렇게 중첩된 시간과 공간에 접하는 묘한 경험은 시간에 대한 부유감을 느끼게 한다.
전시장 풍경, 왼쪽으로부터 <말없이>, <상호침투: 접힌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간여행> 일부
뒤이어 이전의 작업이 차례차례 모습을 보인다. <말없이>는 2001년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진행한 그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그는 당시 이전 작업과는 달리 <말없이>에서 처음 실사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효과를 중첩하여 작업을 진행했다. 즉 실사 촬영한 이미지를 변형하던 기존 작품과 달리, 그래픽 프로그램인 ‘애프터 이펙트(After Effect)’로 정지 이미지 사이에 수십 개의 검정 물방울의 층을 삽입해 부유하는 애니메이션 효과를 실험했다. 푸른 공간 사이를 부유하는 물방울 그래픽 사이로 몸에 힘을 빼고 공간을 채운 무언가에 그 몸을 맡긴 여성의 모습에서 목적을 가진 일상의 시간이 아닌, 그 사이를 표류하는 고독하면서도 시선을 집중하지 않은 개인을 느낄 수 있다.
<상호침투: 접힌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간여행>은 백남준의 <삼원소>에 대한 오마주로서 제작된 작품이다. <삼원소>를 구성했던 삼각형, 사각형, 원형의 도형과 그 내부를 채웠던 청, 녹, 적의 레이저 광선은 각각 3개, 4개, 5개 모니터로 구성된 삼각, 사각, 원형의 배치와 그곳에서 상영되는 영상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이 세 가지 구조에 대해 각각 과거, 현재, 미래라 칭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개미, 보이저호와 각각 흐르는 빛, 흐르는 물의 영상을 담았다. 이들의 반복적인 재생과 그 틈 사이의 정지 장면은 현실과 다른 시간에 대한 경험을 제시하며 우리의 시간관념에 대한 균열을 만든다. <풍경이 된 사람 #4, #5, #6>은 스코틀랜드의 한 숲과 그곳에 서서 숲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영상이 펼치는 시간의 틈새 사이에서 부유하며 목적과 효율에 결부된 분과 초 단위의 현대 시간 개념에서 잠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전시장 풍경, 왼쪽으로부터 <9개의 없는 장소>, <9개의 없는 장소>설치
두 번째로 맞이하는 심철웅의 《없는, 그들 Void Them》은 사뭇 건조하다. 그는 역사라는 거대 흐름 아래 영향을 받는 사람과 기억에 집중한다. 전시의 주제는 ‘전재민’이다. 전재민은 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사람을 말하며 작가는 그중 한국의 식민지 해방 후 구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하는 가운데, 소련 진주로 인해 38선 아래로 피난을 온 이들에 대한 추적을 진행했다. 그는 이들 전재민이 미 군정기 사회에서 기록되지 않은 ‘없는 그들’로 규정하고 역사 속에서 파묻힌 그들을 오늘로 소환했다. 미군정청이 당시 발행한 보고서를 비롯한 신문 기사, 영화 등을 수집하여 아카이브의 형태로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장에는 물리적 구조물과 영상이 등장한다. 구조물로 재구성된 기록으로 전재민이 정착한 지역을 격자 형식으로 구성한 <9개의 없는 장소>를 비롯해 미군정청이 난민이었던 전재민을 수용하기 위해 제공한 삼각토막집과 군용 천막에서 비롯된 <움집 궁전을 위한 모듈>, 각종 보고를 위한 통계자료를 렌티큘러 형식으로 제작한 <일상수치>, <배급과 분배는 제대로 되었는가>가 있다. 각각 삼각형을 기반으로 명확하게 시각적 구조를 제시하는가 하면 렌티큘러 방식으로 2~3개의 시각화 자료를 겹쳐 명확인 인지를 방해하기도 한다. 영상의 경우 <No Place to go>는 작가가 38선 인근 지역을 다니며 촬영한 것으로 위도 38도선을 중심으로 각 방향을 이동하거나 회전하며 기록한 주변의 모습과 위치 데이터를 함께 보여주었다. 역사적 기록에 대한 다양한 재현 방식을 통해 그는 이들을 발췌, 재현하며 드러나는 혼란스러운 사실과 인식에 대하여 다양한 레이어를 통해 꿰어내었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바다>, 2002
동선의 마지막에 그와 일주아트하우스와의 접점인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바다>와 마주한다. 2002년 발표한 이 작품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삶 속에서 두 문화권 모두에 속했지만,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가족을 중심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가 화자로서 나래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가운데 그의 자녀가 집, 동네 이웃, 학교 등 다양한 사회 그룹에서 마주하는 상황이 드러난다. 아이가 말과 행동을 통해 표현하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 혼재와 더불어 세계화라는 거대 담론 아래 혼란을 겪는 개인사를 함께 드러내었다. 그는 세계화와 더불어 당시 가속되던 디지털 문화로 인한 다양한 혼성과 혼재 현상에 대한 현실의 풍경을 자신의 경험에 얹어 풀어내었다.
박화영 전시공간 입구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것은 박화영의 《비너스 도적단의 극장 VENUS BANDIT THETRE OBSCURA》이다. 이 전시는 앞선 두 이야기와 사뭇 결이 다르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오늘의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고 그 해결책으로서 창의적이고 유희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앞선 두 전시의 서술이 차분하고 조용했다면 이 전시는 시작부터 밝고 화려하다. 처음 맞이하는 것은 레트로 극장에서 마주할 것 같은 강렬하게 빛나는 이 장소를 소개하는 라이트박스이다. 뒤이어 오행을 상징하는 목, 화, 토, 금, 수의 다섯 개 색으로 구성된 공간이 이어진다. 각 공간은 각각 다섯 가지 색으로 꽉 찬 공간과 영상, 소품, 사진으로 구성된 강강 일변도의 충격 공간이다.
<C스테이지>, 2019
이 전시는 그의 영화 <아미마모 미마모, 비너스 밴딧>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영화는 부조리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작가가 상정한 게릴라 아티스트 비너스 밴딧에게 사연을 의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비너스 밴딧은 각각의 의뢰를 기반으로 유희적 방법으로 가해자를 응징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가해자는 5가지 색과 그 색에 매칭한 변태형, 망상형, 탐닉형, 폭력형, 충동형으로 분류되어 각각의 스테이지 공간으로 소환되었다. 각 공간에서는 사회에서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복된 상황과 유쾌하게 표현된 피학-가학적 복장과 행위가 강렬한 기반 색과 함께 재생된다. 작업 영상에서는 각각의 상황과 더불어 홍학순 작가의 아기자기하고 깜찍한 애니메이션이 함께 혼합된다. 비현실적인 상황과 구도와 배치는 현실 논리의 전복과 한데 어우러져 매우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이번 전시는 세 작가의 개인전이 직렬 연결된 독특한 구조를 지녔다. 각각의 전시는 개별 전시로 인식해도 될 정도로 독립적이며 양적으로도 모자라지 않았다. 세화 미술관의 공간 구성도 여전하다. 굽이굽이 구획된 동선을 따르며 마주하는 작업을 확인하고 나아가는 재미가 있다. 참여 작가들의 작품과 제시 형태는 세련되다. 아쉬운 지점은 맥락의 부재이다. 왜 이 3인인가. 왜 이 3인이 묶였는가. 당시의 선정과 오늘의 소환에서 드러나는 차이와 의미는 무엇인가. 세화의 이름을 단 미디어아트 프로젝트가 2000년대 일주아트하우스의 계승을 표방한 만큼, 소개 작가를 오늘로 소환하여 재배치한 맥락이 전시를 통해 조성되었어야 했다. 또한, 이 3인을 연결 지을 그 무언가가 희미하다는 점도 아쉽다. 단지 ‘비디오라는 매체를 사용했다’라는 사실을 넘어 2001, 2002, 2003년이라는 연속된 개인전의 기획 당시 주최 측이 주목했던 특성, 예컨대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 탐색, 디지털 개념의 등장으로 가속화된 새로운 문화 혼성 시대, 당대를 바라보는 청년의 시각, 다양한 지원을 통해 접근하는 공공성의 개념 등이 전시 상에서 조금 더 잘 드러났다면 더욱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세화 미술관에서 그 이름을 내세우며 미디어 아트에 대한 기획을 시작한 첫 포문은 바로 영상이다. 2000년대 일주아트하우스가 주목한 예술 활동이었고 오늘날의 주류가 영상문화임을 볼 때 시의적절하다. 네이버(Naver)를 제치고 유튜브(YouTube)가 검색엔진으로 인식되는 현실이 보여주듯, 오늘의 문화 소비가 텍스트나 이미지가 아니라 영상 콘텐츠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탐구의 당위성은 명확하다.
한편으로 ‘미디어 아트’라는 현재 다루기 조심스러운 이름을 건 만큼 세화미술관이 표방할 오늘의 방향성이 궁금해진다. 최근 미디어 아트라 칭하는 예술 활동 및 결과물은 컴퓨팅(Computing)과 관련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만물이 컴퓨터를 매개로 연결되고 있는 가운데 창작자들은 이 현상이 가진 의미와 빈틈, 가능성, 우려 등에 대하여 기술적, 경제적 논리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알고리즘을 비롯한 물리-가상이 혼합된 풍경을 탐구하고 있다. 세화 미술관의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가 과거를 계승하여 ‘영상’에 집중할지, 미디어가 가진 의미를 탐구하며 영역의 확장을 행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또한 미술관 측에서 밝힌 것처럼, 과거의 발굴을 넘어서 오늘날 시작 지점에 놓인 젊은 아티스트들을 찾아내어 그들이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으로 활약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일주아트하우스는 그 토대에서 소개하는 작가들을 ‘미디어 레이더스(Media Raiders)’라고 지칭했다. 세화 미술관이 가진 오늘의 미디어 아트에 대한 시각, 그리고 그것을 표출할 오늘의 새로운 미디어 레이더스는 어떤 창작자들일지 흥미진진하게 기다려본다.
글. 허대찬 | 앨리스온 편집장
* 본 리뷰는 [월간 퍼블릭아트] 2020년 1월 호 지면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