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나인(Rebel9)은 문화예술분야에서 상당히 독특한 입지를 가진 집단이다. 처음 이들을 알게 된 것은 2017년 서교동에 개관한 엘리펀트 스페이스(Elephant Space)라는 공간을 통해서였다. 미디어 아트에 관심이 있다면 익숙할 오스트리아의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 센터에 소속된 연구소인 퓨쳐랩(Future Lab)이 선보였던 고해상도 다면 공간 프로젝션 기술 플랫폼인 딥스페이스 8k(Deep Space 8K)와 같은 결의 몰입형 공간 및 연계 콘텐츠의 개발과 시연을 시도했던 곳이다. 단순히 공간을 조성하고 전시와 행사를 기획하는 것을 넘어 시스템과 솔루션을 비롯하여 콘텐츠를 자체 기획하며 소개했던 곳이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레벨나인은 이러한 시도의 근간으로, 문화예술과 그 세계를 데이터로서 다루며 기획, 디자인, 개발과 실질적 구현까지 모두 활동 영역으로 포괄한다. 일련의 문화 활동과 산물을 정보로서 다루고 아카이브로 안착하며 그에 대한 경험을 설계하고 접점을 형성하는 그들이 손동현 작가와 만나 전시를 함께 진행한다는 소식은 정신없게 돌아가는 일상의 파고를 뚫고 들어오는 유채색의 소식이었다. 이들이 어떻게 만나 어떠한 접점을 만들고 어떤 풍경으로 안착되었을까.
또 한 명의 주체인 작가 손동현은 2006년 개인전 《파압아익혼:波狎芽益混》을 통해 기억의 긴 간극을 뚫고 또렷하게 치고 올라오는 작가이다. ‘팝 아이콘’이라는 제목을 한자로 음차한,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의미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제목의 센스에서부터 기억으로의 각인은 충분했다. 영화나 만화 등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악당을 우리 전통회화의 기법으로 재해석하여 소개한 그의 시각은 초상화와 같은 장르를 넘어, 이후 다양한 표구 방식과 형식, 재료에 대한 실험을 통해 한국화 전반에 걸친 전통에 대한 재해석과 관점의 연결 실험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만나는 무대인 ‘아워세트’. 융복합형 예술콘텐츠를 표방하며 동시대 미술을 다양한 각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장으로서 작동 중인 수원시립아트스페이스광교는 개관 3주년을 맞이하며 2022년 《아워세트》라는 전시를 개최했다. 이 전시에서 사진과 조각의 개념을 연결하며 전복과 재맥락화 등의 시도를 진행해 온 작가 권오상과 현대미술영역을 기반으로 공간에 대한 연출과 구성 탐색을 진행해 온 크리에이티브 그룹 아워레이보가 만났다. 한 명의 작가와 그 해석자로서의 창작자가 만나 접점을 형성하고 그에 대한 연계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로써 자리했던 기획이 2023년 이어져 작동 중이다.
전시장에 입장해서 처음 마주하는 것은 중앙의 직사각형 기둥 형태의 콘솔 장치와 그 주변에 배치된 인물화 패널들이다. 콘솔 장치의 수직으로 뻗은 4개의 면은 디스플레이 장치가 차지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무언가를 입력하기 위한 키보드가 배치되어 있다. 장치 주변에는 손동현의 초기 작업인 마이클 잭슨, 배트맨, 조커 등 대중문화에서 매우 잘 알려진 캐릭터들이 한국화의 기법으로 표현된 이미지가 라이트패널 형태로 빛을 발하며 그 주변을 둘러서 있다.
레벨나인의 <라이트하우스 – 우리가 묻는대로>(2023)는 전시에 입장한 관객이 처음 마주하는 작품이자, 이 전시의 전반적인 관계를 함축하는 파사드(Façade)이다. 이 작품은 정보를 제공하는 콘솔 기능을 가진 구조물이다. 4면의 디스플레이에는 마치 금속판화를 연상케 하는 거친 질감의 밤바다와 그 풍경을 점멸하며 비추며 화면을 가득 메우는 등대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키보드를 누르면 작가 손동현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활성화된다. 인터페이스의 첫 인트로는 ‘이곳이 등대이며 등대는 지식을 찾는 여정의 안내자이고 이 앞에 선 여러분이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출발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묻는다. 시스템은 손동현의 작품과 활동 등 그와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이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서비스인 chatGPT를 파인튜닝한 구조를 활용한다. 따라서 관람자는 가이드로 제시되는 질문뿐 아니라 다양한 자유질문을 통해 작가와 작품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닌 독특한 지점은 이곳에서 관람자가 인공지능과 상호작용하며 정보를 열람하는 활동이 기존의 정보 검색과 다르다는 점이다. 레벨나인은 chatGPT로 대표되는 현대 인공지능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기반으로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다. 여기에서 인공지능은 검색엔진의 역할을 넘어서, 소지하고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제기된 질문에 대한 새로운 맥락 정보를 생성하여 전달하는 ‘해석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작가에 대해, 작품세계와 전시에 대해,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이곳 수원에 대해, 그리고 자유질문에 대하여 단순한 정보 수집과 정리를 넘어서는 정보 층위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작가가 배트맨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지, 작품 재료를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 작가가 마이클 잭슨의 어떤 노래를 가장 싫어하는지 등 기존의 관념으로는 수집될 수 없는 정보에 대해, 마치 작가나 도슨트를 대하는 것처럼 맥락에 대한 이해와 해석 차원으로 정리된 정보를 맞이할 수 있다.
이곳 정보의 바다는 ‘우리가 묻는대로’ 정해진 항로나 이벤트를 맞이하는 일반적인 여정과 달리, 어떤 질문에도 답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창조의 바다와 같다. 이곳에서 인공지능은 항해의 조력자이자 원하는 곳을 비추는 등대로서 자리한다. 이 등대는 질문자의 태도와 관점에 따라 대답의 뉘앙스와 관점을 달리하기도 한다. 4개의 디스플레이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등대를 보여주고 있으며 각각 ‘어린이를 위한’, ‘영어 사용자를 위한’, ‘문학적인’, ‘일반적인’ 답변을 진행하는 개성을 상징한다.
또 다른 두 창작자의 접점은 레벨나인의 <만화경>(2023)이다. 이 작품은 손동현의 <잉크 온 페이퍼>(Ink on Paper, 2015-2022) 시리즈를 기반 데이터로 삼는다. 시리즈의 작품들이 디지털 패널에 표시되고 있는 가운데 관람자가 그들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어떤 형태와 운동 패턴으로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한 후 실행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선택된 작품이 그 앞에 펼쳐진 2면이 이어진 코너 벽면에 만화경처럼 확장되어 디지털 풍경으로서 펼쳐진다.
<잉크 온 페이퍼> 시리즈는 붓과 먹으로 그려진 한국화 또는 동양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될 때 ‘ink’로 번역됨에 착안한 작품이다. 이것은 잉크(잉크 ink)가 포괄하는 재료적 다양성과 물성에 주목하여 각각의 물질적 특성에 대응하는 이미지와 표현 방식을 탐구했다. 그렇게 이 시리즈에 포함된 ‘잉크(잉크 ink)’의 다양성에 기반한 작업의 이미지가 분류 정리되어 디지털 패널에 출력된다. 관람자는 이미지를 하나 선택하여 확대, 축소, 회전, 크롭하는 등 우리가 일상에서 사진 어플을 통해 진행하는 이미지 편집 방식을 적용해 전시실 벽면을 가득 채우는 디지털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는 일상적인 이미지 관련 행위가 공간에 개입하고 다루는 공간적 행위와의 연결이며 가능성에 대한 체험이며 또 다른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재현이다.
또한 전시장에서는 ‘당신은 미술관에서 마음껏 뛰어본 적이 있나요’라는 무언가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는 레벨나인의 <서베이>(Survey, 2023)가 관람자의 눈길을 이끈다. 이 콘솔은 참여자의 전시장에 대한 경험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관람자는 각 질문을 화면에서 확인하고 ‘Yes’와 ‘No’ 버튼을 누른다. 작품은 이를 수합하여 그 결과를 통계로 보여준다. 그 주변에는 동양화 중 문인화를 그리거나 감상할 때 취해야 하는, 일종의 프로토콜인 육법(六法)의 6가지 요소를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무술인 무공에 빗대어 표현한 <육협>(2015)이 배치되어 있다. 각 화폭에는 육법의 원칙에 따라 표현된 주인공들이 기운생동(살아있는 대상을 생생하게), 골법용필(붓을 사용할 때 뼈에 힘이 깃들어야 함), 전이모사(옛 그림을 따라 새 그림을 그리기) 등을 작법에 따라 표현된 결과물을 통해 보여준다. 이들은 레벨나인이 제시하는 정보 콘솔과 함께 시기별, 공간별, 개념별로 묶여 관객에게 맥락을 연결한 콘텐츠로서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드(grid) 형태 단위로 구성된 설치 구조물은 이들을 같은 맥락지대로 묶어 관객의 시선을 이끈다.
전시 공간 전체의 동선 구조는 손동현 작가의 작품을 수평적 이동을 통해 연속적인 흐름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관객이 레벨나인의 정보를 다루는 관점과 구성을 열람하고 조작할 수 있는 웨이포인트적 거점이 자리한다. 손동현 작가의 여정은 재현의 모델,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물성과 재료, 표현으로 관심의 대상을 옮긴 궤적이며 레벨나인의 중간 거점들은 관람자의 조작이 전제된 인터랙티브 콘솔로 새로운 정보의 열람과 접점 형성 경험을 제공한다. 그 경험은 단순한 페이지 기반의 평면적 열람이기보다는 공간적이며 유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2020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자료는 <정보의 미술관, 미술관의 정보>(2020-2021)에서 지리 정보에 기반한 공간적 콘텐츠로 펼쳐지며 열람자는 조이스틱을 통해 작품 정보에 접근하고 후퇴하며 그곳을 열람한다. 미술평론가 최민이 기증한 최민 컬렉션은 <아카이브 런>(Archive Run, 2022)에서 게임적 공간이 되어 접속자는 키보드나 마우스 대신 게임 콘트롤러를 쥐고 캐릭터를 조종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수집을 완료하면 그 정보는 맥락과 흐름이 잡힌 콘텐츠로 전환되어 그 이야기를 출력한다.
‘정보를 다루고 이를 아카이브라는 개념으로 전환해 문화적 경험으로서 접촉하게 할 수 있을까.’ 레벨나인의 김선혁 대표가 말하는 그들의 목표이다. 유물, 문화재, 예술작품과 같은 문화적 산물과 관람자 사이의 접점을 형성하는 기존의 관행과 문법에 대한 질문과 이를 기반으로 한 접근 시도라는 측면에서 저항(rebel)이 그들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데이터를 다루고 정보의 접촉면을 디자인하여 데이터스케이프(datascape)로서의 공간을 제안한다. 레벨나인이 펼친 공간은 데이터를 인식하고 각각의 의미영역으로 분류한 후, 이를 연결할 수 있는 연결망을 형성한 곳이다. 사용자는 이곳에서 이러한 연결망 간의 선택, 이동, 확대 및 축소와 같은 ‘열람’과 각 객체 간의 연결, 단절, 재연결과 같은 ‘편집’을 모두 수행할 수 있다. 조작이라는 행위에 대한 수동적, 적극적 접근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레벨나인의 주 활동 중 하나이다. 이곳, 아워세트는 손동현이 걸어온 길을 펼친 것이며 그 길 위에 시간에 따라 변화한 그의 관점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분류 배치되었다. 이 작품은 그가 시간과 공간, 재료와 기법을 다루며 이루어낸 변화의 증거이자 수행의 결과물이다. 그 변화와 방법론은 레벨나인이 다루어 온 정보 공간과 구조의 관점과 닿아있다.
손동현의 시공간적 궤적은 레벨나인의 시공간적 관점과 맞닿아 여행을 제안하는 바다로서 펼쳐졌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각자의 독립된 흐름 속에서 서로의 작업 라인이 교차하는 상황에 가깝다. 두 궤적은 공간을 함께 부유하며 중간 중간 접점을 형성하며 겹친다. 이러한 접점은 레벨나인이 손동현 작가의 작업을 스트리밍 데이터로 바라보며 그곳에 관람자가 조작할 수 있는 터미널을 형성한 것이다. 그 터미널은 관람자의 시선을 이끄는 반짝이는 부표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하고 그곳에 손을 얹고 접속하여 조작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곳을 찾은 관람자는 조성된 그 판 위를 거닐면서 찾고 바라보며 습득하는 열람자임과 동시에 바라는 바를 적극적으로 들추어보고 찾는 탐색자로 자리한다. 그는 그 사이사이를 거닐며 제안된 방법으로 활동하여 의미를 수집한다. 그곳에 손동현 작가가 전통적 동양화의 형식과 화법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로서 걸어 온 58점의 작품과 레벨나인이 기존의 문화적 산물과 관람자 사이의 접점을 기존의 관행과는 다른 새로운 접점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담은 9점의 작품이 한데 모였다. 관조와 개입, 유람과 참여가 공존하는 공간이 아워세트가 갖춰놓은 판이며, 이러한 교차 제안은 창의적 탐구와 이해의 기회로서 늘 기껍다.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편집장)
* 이 글은 아워세트 : 레벨나인x손동현 전시 도록에 수록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