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서울사진축제가 <오픈 유어 스토리지 : 역사, 순환, 담론>이라는 제목으로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 1회부터 8회까지는 공모를 통해서 선임된 예술 감독의 기획으로 진행되었던 반면, 작년 9회부터는 예술 감독을 따로 선임하지 않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내부적으로 직접 서울사진축제를 기획해서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서울시에서 2021년에 준공 예정인 사진 전문 미술관의 개관에 맞추어 미리 사진 전시의 기획 역량을 강화하는 과정이라고 여겨진다.
지난 아홉 번의 서울사진축제는 서울 시민들에게 사진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주제의 전시와 행사를 제공해 왔다. 여타의 미술 전문 비엔날레와는 달리, 서울사진축제는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축제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예술성에 중점을 둔 비엔날레보다는 공공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서울시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공모를 통해 선정된 예술 감독 중심의 전시 기획이나 행사 진행 방식을 살펴보면 서울 시민들의 생활 양상의 변화나 서울의 구체적인 도시 환경의 변화 등을 사진으로 수집하고 전시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축제가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2년의 제3회 서울사진축제이다. 당시에 서울사진축제 측은 일반 시민들에게서 사진들을 기증받아서 서울의 과거 모습을 발굴하고 전시하는 기획을 진행하였다. 즉, 기증받은 사진들을 통해 개인의 생애사, 가족사, 마을사 등을 보여주는 전시를 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서울의 과거나 현재를 중심으로 한 사진 축제의 기획을 매년 진행한다는 것은 주제와 소재 측면에서 지속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경계선을 벗어나 점차 다양한 주제가 서울사진축제의 기획으로 다루어지는 경계선의 확장이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2016년의 제7회 서울사진축제에서는 <서울 新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유대인의 이주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디아스포라 개념을 전용하여, 도시화와 세계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주의 문제들을 전시 주제로 다루었다.
이번 전시는 제10회라는 기념비적인 숫자 때문인지, 그동안 서울사진축제가 기획했던 전시 방식 중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보여주었던 기획 구성 방식들을 모두 활용해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역사, 순환, 담론”이라는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거대한 세 가지 테마를 모두 다루고 있는 것이다. 보통 모든 것을 아우르려고 할 때, 모든 것을 아우르지 못하게 되는 역설과 마주하기 마련인데, 제10회 서울사진축제도 이러한 결과를 피하지는 못하였다. ‘역사’를 다룬 전시는 ‘순환’을 다룬 전시와 유기적인 연결성을 갖지 못했고, ‘순환’을 다룬 전시 역시 ‘담론’을 다룬 리서치 쇼와 어떤 연결성도 구축하지 못했다. 물론, ‘담론’을 다룬 리서치 쇼와 ‘역사’를 다룬 전시도 전혀 다른 지점에서 기획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세 개의 테마로 구성된 전시를 순차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확인해 보겠다.
팸플릿에는 ‘전시 1’이나 ‘전시 2’와 같이 전시 구성의 순서가 표기되어 있었으나, 실제 전시장에는 그러한 숫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전시장 입구에서 도슨트에게 동선을 물어보니, 전시 세 개에 대한 관람 순서는 딱히 없으나 역사 파트의 전시부터 관람하는 것이 좋다는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부제 중 ‘역사’를 맡은 <전시 1 – 명동 싸롱과 1950년대 카메라당>은 한국 전쟁 직후 1950년대 한국 사진사의 아카이브와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1’은 방대하고 깊이 있는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관람자에게 1950년대 명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진 환경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시 1’은 두 개의 전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1부’는 명동의 사진 공간의 탄생과 변화를 중심으로 역사의 인과 관계를 순차적인 동선으로 깔끔하게 잘 정리한 전시였다. 이렇게 잘 정리된 도큐먼트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전시1’의 기획을 서울시립미술관 내부의 큐레이터가 아니라 외부의 전문가에게 맡겼서 진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진사를 도큐먼트 중심으로 소개하는 전시 기획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왔고, 서울사진축제 전시의 예술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던 기획자의 역량이 십분 발휘된 것이다. ‘모더니즘의 탄생’이라 명명된 ’제2부’에서는 당시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사진가 4인 – 임응식, 이형록, 한영수, 성두경의 방대한 작업 중에서 모더니즘 경향의 사진들을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다. 소위 싸롱 사진이라고 불리는 일제시대의 예술사진의 경향이 모더니즘에 영향 받은 사진들로 변모하는 과정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굴해 보여준다. 작가들의 작품인 ‘아날로그’ 필름을 스캔해서 ‘디지털’ 프린트로 전시하고 있는데, 소위 레트로 열풍이라고 불리는 동시대의 감성에 진정한 레트로를 던져 줌으로써 “이게 진짜야!”라고 외치는 듯하다.
이번 서울사진축제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부제 중 ‘순환’을 맡고 있는 <전시 2 – 러브 유어셀프>이다. 우선 도슨트에게 ‘전시2’의 동선을 물어보면 이번에도 딱히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는데, 전시장을 둘러봐도 동선을 느낄 수 없게 작품들이 넓은 공간에 여기저기 던져져 있다. 파편화되어 맥락이 쉽게 잡히지 않는 동시대의 온라인 문화를 표현하고자 한 거라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파편화된 전시 구성은 선정된 작가 및 작품들의 맥락에서도 일관성이 없어서 그러한 자기 최면적 설득력도 상실한다. 두 세 명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동안 미술관 전시에서 만나지 못한 신인 작가나 팀으로 전시 작가들이 구성되어 있는데, 전시 기획자가 새로운 작가들로 전시를 기획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지만, 그만큼 관람객에게 신선함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러브 유어셀프>는 기획의 신선함 대신, 전시 기획에 대한 무분별한 자기애만을 보여주었다.
특히, 무궁화소녀와 같은 SNS 스타 작가의 작품은 오프라인 전시에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되어 있는 작가 본인의 작업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화면 크기에 맞춰 보정된 작가의 사진들이 무리하게 오프라인으로 소환되어, 조악한 퀄리티로 프린트된 채 전시장을 수놓고 있다. 특히 전술했던 ‘전시1’ ‘제2부’의 모더니즘 사진들을 통해 진정한 레트로 사진들을 보고 관람할 경우, 무궁화소녀의 후보정으로 만들어진 인위적 레트로 사진의 프린트 퀄리티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시기획자와 제대로 조율하지 못한 작가의 한계로 볼 수도 있지만, 안일한 전시 기획자의 문제가 더 크다.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사진’은 최종 아웃풋을 고려해서 제작되기 마련이다. 작가의 작품이 지낸 맥락상, 모니터나 태블릿과 같은 다수의 전자 스크린을 통해 인스타그램과 유사한 형식으로 작품들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적합했을 것이다. 인스타그램이 최종 아웃풋임을 고려해서 작업된 결과물을 굳이 억지로 크게 프린트해서 ‘액자’의 형식을 갖춰 전시장으로 끄집어낸 전시기획자의 의도가 참으로 무모해 보인다.
전시 기획 단계에서부터 검토하고 조율되었어야 할 부분들이 부족한 작가들은 이 밖에도 더 있다. 불꽃페미액션은 무궁화소녀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측면에서, 잘못된 전시 방식을 보여준다. 불꽃페미액션은 페이스북과의 사진 검열 투쟁으로 주목받은 단체이다. 그런데, 아무리 페이스북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그렇지, 전시장에 페이스북의 불꽃페미액션 페이지만 달랑 띄어놓은 컴퓨터 한 대만 설치해둔 것은 너무 무성의하지 않은가? 페이스북을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페이스북에서 과거의 이슈들을 찾아보는 것이 얼마나 많은 페이지 롤링을 동반해야 하는 번거로운 행위인가? 그리고 관람객이 많은 전시장에서 누가 컴퓨터를 혼자 차지하고 앉아서 페이스북 페이지를 롤링하고 있을 용기를 내겠는가? 이렇게 페이스북 페이지만 소개하고 말 거라면, 차라치 페이스북 페이지로 연결되는 QR코드를 크게 전시해서 스마트폰으로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전위적인 전시 기획의 자세가 아니었을까? 또한, 뿔꽃페미액션의 경우, 그들의 활동 내용이나 페이스북의 사진 검열이라는 측면 등에서 볼 때, 서울사진축제의 전체 구성에서 ‘순환’보다는 ‘담론’에 더 어울리는 팀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이번 서울사진축제는 축제 구성의 전반적인 조율 문제에서 허술한 부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안성석의 작품 역시 작품 자체로서는 흥미로웠으나 셀카봉을 든 김정은이 나오는 장면을 통해 ‘셀피 문화’를 다루었다는 측면을 제외한다면, 과연 서울사진축제에 어울리는 작품이었는지 의문이다. 셀피 문화를 다룬 ‘사진’ 작업들도 충분히 많을 텐데, 굳이 미디어 작가인 안성석의 작품을 전시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사진도 매체이고 미디어 아트도 매체 예술이니, 3D 엔진으로 만든 동영상 작업도 사진 전시에 적합하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언하는 것인가?
‘순환’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중 가장 낯익은, 소위 기성 작가는 KDK인데, 그는 굉장히 오랜 수고와 정성을 다한 설치 작업인 <스틸 라이프>를 선보였다. 이 작업은 <인스타그램@kdkkdk>의 후속 프로젝트로 1년 동안 촬영한 365장의 사진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색상을 팬톤 앱으로 추출하고, 추출한 색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후, 업로드한 팬톤 색상의 사진을 다시 ‘프린트’해서 전시한 작품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에디션의 유효성 등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자 한 작업”이라고 하는데, 작가 본인이 결국 물성에 기반한 오프라인에서 활동하는 작가란 존재임을 자문자답하는 작업이 되고 말았다. 이 작업의 원전인 <스틸 라이프> 역시, 인스타그램에 올린 365장의 사진을 묶어서 책으로 발행하였던 것처럼, 작가는 다시 오프라인의 물성으로 돌아오는 작업을 선보였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기 위해 촬영하고 만든 사진을 왜 다들 전시장에서 프린트해서 보여주려고 안달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행위들이야 말로, 예술 및 문화의 주도권을 온라인에 빼앗긴 현실을 오프라인에서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는 최후의 발악을 작업의 형식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규격화된 작은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인스타그램의 즉각성을 어떻게든 오프라인으로 불러들이려고 하는 노력이 참으로 부질없어 보인다.
이밖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 역시, ‘순환’이라는 전시의 기획에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온라인에서만 펼쳐지는 작가들만의 개성이라던가, 동시대 사진예술만이 지닌 특이한 컬트적 현상이라던가, 소외받고 있는 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라던가, 인식하기 쉽지 않은 사회적 이슈의 발견이라던가, 사진 매체와 다른 예술 매체간의 하이브리드적 현상을 다룬다거나. 핵심 주제의 부재 속에 맥락을 부여받지 못한 여러 작품들이 그저 난삽하게 흩어져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기획자는 과연 이렇게 어떤 맥락도 갖지 못하는 난삽함이 동시대 문화의 ‘순환’을 보여주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순환’하고 있다는 것인가? 전시된 대부분의 사진들이 “프레임을 벗어나 확장하고 결합”할 수 없는 증거로 기능하며, “새롭게 생성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오늘날의 동시대 사진들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서울사진축제의 마지막 파트는 ‘담론’이다. 사실 담론 파트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리서치 쇼>를 표방하고 있다. 서울사진축제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총 아홉 개의 리서치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그 결과를 적합한 형태로 전시하고 강연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리서치의 내용에 대해 발표하는 강연이 이 파트의 핵심인 것으로 보이는데, 일정 관계상 강연들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리서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키워드를 선정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리서치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총 9개의 리서치 결과는 각 프로젝트에 적합한 형태로 전시되고 축제 기간 내 강연으로 이어진다”는 표현이다. 이 분야에 아주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리서치 테이블에서 다루어진 대부분의 내용들이 이미 최근 몇 년간 여러 지면을 통해서 논해지고 발표된 것들이다. 마치 서울사진축제가 직접 키워드를 설정하고 연구자에게 제안해서 그 결과물을 뽑아낸 것처럼 호도하는 문장들을 사용해서는 곤란하다. 서울사진축제는 이미 발표된 리서치들을 ‘큐레이션’한 것이다. 사진계를 잘 모르는 (앨리스온의 에디터들을 포함하여) 미술인들이 이미 발표된 내용이라는 것을 모르고, 리서치를 의뢰한 서울사진축제의 기획력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니, 이러한 반응을 노린 의도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라는 의심마저 든다.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을 사용해주면 좋겠다.
한편, 리서치 쇼를 장식한 전시들은 각 리서치의 주제에 걸맞는 적절한 전시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아홉 개의 리서치를 사진이나 도큐먼트를 통해 소개하는 방식으로 기획된 전시 구성이, 오히려 사실상 본 전시인 ‘순환’의 전시보다도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 관람하기에 좋았다. 그것은 각 리서치의 주제가 매우 분명했고 그 주제에 대한 도큐먼트 중심의 시각화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샘이 깊은 물>의 설치는 효과적인 도큐먼트 전시의 전형을 잘 보여준 것 같다. 다만 아쉬운 부분도 있었는데, ‘사진바다의 아카이브’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사진을 매체로 다루는 작가나 전시 관계자들이라면 ‘사진바다’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다. 사진바다에서 이십년 가까이 구축되어 온 사진 전시 및 행사들의 아카이브를 새로운 홈페이지로 소개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완성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전시 장면들이 그저 화면보호기의 사진들처럼 무작위로 보여지고 있어 매우 아쉬웠다.
이렇게 역사, 순환, 담론의 세 가지 내용으로 기획된 제10회 서울사진축제를 훑어보았다. 제10회 서울사진축제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울사진축제가 가장 잘 해왔다고 여겨지는 한국사진사의 소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소개, 의미 있는 사진적 담론의 소개, 이 세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내용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렇게 기획된 전시 구성이 하나의 큰 주제로 수렴되지 못하면서 그동안의 축제들과는 달리 기억에 남을만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역사’에서 1950년대의 명동 싸롱과 모더니즘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순환’에서는 동시대의 ‘싸롱’인 인스타그램이나 혹은 다른 사진예술 집단에서 발견되는 특수성을 보여주고, ‘담론’에서 이러한 사진계의 변화와 특수성이 지닌 가치, 한계, 전망 등을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관객이 전시를 통해 다소 좁은 영역에서라도 사진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1950년대의 한국사진사는 다시 한 번 전시장에서 역사적 증거로 박제되었고,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은 뿌리도 중심도 미래도 없이 두둥실 각자 전시장을 부유하고 있으며, 무려 아홉 개나 되는 리서치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시장 한 구석에서 중얼중얼 대는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서울사진축제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던 열 번째 축제 <오픈 유어 스토리지>는 그 기획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오픈 유어 리미트>가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비엔날레들이 2년 동안 주제를 설정하고 하나의 맥락으로 수렴되도록 열심히 전시를 준비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 매년 진행되는 서울사진축제가 이렇게 방만하게 따로 국밥, 뷔페 스타일의 전시를 기획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주제를 설정해서 집중하는 방법을 통해 관객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사진축제를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와는 달리 매년 진행되는 축제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서울사진축제가 사진 관계자들만의 자축 행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2020년의 제11회 서울사진축제는 좀 더 충실한 기획으로 관람객들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정현목 | 앨리스온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