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마틴 – 현대 소비 사회의 매혹적인 초상(肖像)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의 힘은 강력하다. 날씨나 유행에 대한 일상적인 대화 뿐만 아니라 선호하는 음악이나 영화 장르와 같은 개인의 취향에도 영향을 줄 정도이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광고도 있다. 현대 사회의 미디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광고는 소비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일찍이 『소비의 사회』에서 간파하였듯이 현대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요소는 ‘소비’이다.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대량 생산 시스템은 대량 소비를 필요로 하였고, 대중들은 소비자로 변모하였다. 대량 생산은 한 개의 상품이 지닌 가치를 낮추었으며, 따라서 판매를 위해 상품들 상호 간의 차별성이 중요해졌다. 생산 중심의 전통 사회에서 상품 간의 차별성이 중요한 소비 중심의 현대 사회로 변화한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특정 상품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광고의 중요성이 더욱더 커졌으며, 광고 이미지가 현대 사회의 미디어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하비에르 마틴(Javier Martin)은 현대 사회의 미디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광고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세계로 다룬다. 하비에르는 자신의 대표작 《블라인드니스 컬렉션(Blindness Collection)》에서 케이트 모스, 소피아 로렌, 나오미 캠벨을 비롯한 아름다운 모델들의 광고 사진을 활용한다. 광고에서 상품 간의 차이를 명료하게 인식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 유명한 인물을 상품의 모델로 사용하는 것이다. 작가는 인쇄 매체의 광고 사진이나 패션 화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델들의 사진을 복사해 대형 크기로 프린트한 후 인물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회색 톤의 물감으로 칠해서 제거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광고를 위해 제작된 원래 사진의 맥락이 사라지고 오롯이 아름다운 여성 모델들의 모습만이 남게 된다.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잠재적 소비자들에게  치명적인 유혹의 몸짓을 보이던 모델들이 오롯이 자신의 모습만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리처드 프린스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카우보이에 대한 신화를 비판하기 위해 말보로 담배 광고를 차용하였듯이, 하비에르는 현대 사회의 소비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광고와 패션 화보 속 모델들의 사진을 차용한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광고에서 사용된 모델들의 사진을 차용하는 전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길거리에서 고객의 시선을 끌기 위해 발전한 네온 조명을 모델들의 사진 위에 콜라주 한 것이다. 네온 조명은 일찍이 브루스 나우만을 비롯한 여러 작가가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많은 작가들이 선호하고 있는 매체이다. 기존의 작가들이 네온 조명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텍스트 기반의 소위 ‘네온 사인(Neon Signage)’ 작업을 선보였던 것과 달리 하비에르는 모델들의 눈 위로 텍스트가 아닌 기하학적 패턴의 네온 조명을 배치하였다. ‘맹목, 무분별, 무지’라는 의미로 해석 가능한 ‘Blindness’라는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작가는 모델의 눈을 네온 조명으로 가림으로써 현대 소비 사회의 문제점을 은유적으로 지적한다. 모델의 유혹에 눈이 멀어버린 소비자들이 아름다운 모델과 상품을 동일시하여 맹목적으로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현대 소비 사회의 특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비에르는 《블라인드니스 컬렉션》 이외에도 현대 사회의 소비문화를 비판하는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했다. 《블라인드니스 위안(Blindness Yuan)》은 중국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는 동안 작업한 것으로 패션화보에 등장한 모델들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위안화에 사용된 도안들로 치환한 작품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하면서 금권주의(金權主義)가 팽배한 중국 사회의 모습을 중국의 화폐 도안을 이용하여 풍자한 것이다. 금권주의의 팽배는 중국만의 현상이 아니며 자본주의가 갈수록 고도화되는 가운데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작가는 화폐의 도안을 작품에 차용함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자본의 문제를 다루었다. 또한, 작가가 작품에 사용한 패션 화보 사진에서 모델이 입고 있는 대부분의 의상이 고가의 럭셔리 브랜드라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작가가 굳이 모델의 의상을 화폐의 도안으로 치환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경제적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구입하는 현대인의 과시적 소비 심리를 지적하는 것이다.

 

 

한편, 하비에르는 《페이머스 컷(Famous Cut)》에서 앤디 워홀, 피카소, 메릴린 먼로 등 누구나 알 만한 유명 인사들의 얼굴을 사용한다. 작가는 유명 인사들의 초상을 조각내어 코나 입, 혹은 귀나 목 등 초상의 일부분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들을 제거하여 비워놓는다. 작가는 인물의 윤곽선과 남겨진 부분들만으로도 충분히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미디어를 통해 유명 인사들의 우상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유명 인사들의 얼굴은 미디어를 통해 특정 분야의 영웅으로 우상화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가 있는 하나의 브랜드로서 소비되고 있다.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의 얼굴이 프린트된 상품들이 자본주의 사회인 서구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소비가 발생할 수 있다면 유명 인사의 우상화가 얼마나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유명 인사들의 초상을 기하학적으로 조각낸 작품의 회색 골격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구조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작가는 성당의 유리창에 장식되었던 가톨릭 성인들의 얼굴을 현대의 유명 인사들의 얼굴로 치환함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유명인의 초상이 우상화되는 현상을 비판한다.

하비에르는 2016년에 개최된 아트바젤 홍콩에서 《라이즈 앤 라이트(Lies and Light)》라는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 퍼포먼스에서 자신의 대표작인 《블라인드니스 컬렉션》에서 사용하였던 빛나는 네온 조명들을 오직 자신의 신체로 부수며 전진한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 내재한 모순과 갈등 그리고 두꺼운 장벽을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작가는 어둠을 물리쳐주는 빛을 부숨으로써 밝은 빛이 가리고 있던 현대 사회의 어두운 측면들을 다시 한번 직시하는 경험을 관람객들과 공유한다.

《블라인드니스 더 다크 박스(Blindness the Dark box)》는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작된 설치 작품이다. 관람객은 전시장에 설치된 네온 조명 앞에 서서 《블라인드니스 컬렉션》에 등장하는 모델처럼 자신의 눈을 네온 조명으로 가려 볼 수 있다. 현대 미술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해서 작품의 일부가 되어보는 체험 과정이 중요해지고 있는데, 하비에르 역시 그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관람객은 이러한 참여를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Blindness’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예술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하비에르의 다양한 작품들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유명인의 초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모델이나 배우, 혹은 작가와 같은 유명 인사들은 미디어를 통해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자신의 얼굴 자체가 상품이자 브랜드가 된다. 하나의 브랜드가 된 이들의 얼굴은 다시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신뢰의 아이콘으로 미디어에서 사용된다. 현대 광고 이미지의 핵심에는 소위 셀럽(Celeb)이라고 불리는 유명 인사들이 있으며, 유튜브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인플루언서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홍보 수단의 등장으로 인해 유명인의 사회적 영향력은 더욱 광범위해지고 있으며, 동시에 그 폐단도 함께 커지고 있다. 작가는 유명인의 초상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맹목적 소비로 유도하는 현대 소비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아름다운 인물 초상과 반짝이는 네온 조명이 관람객을 유혹하고 있지만, 그 시각적 매혹 너머에는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비에르의 작품은 시대적 문제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자 예술적 응답이다. 작가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사용되었던 차용의 전략을 사용함과 동시에 상업 공간에서 사용되는 네온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팝아트의 전략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 미술과 개념 미술에서 활용되었던 퍼포먼스까지 시도하는 등, 이전 세기에 사용된 주요한 예술적 표현 방법들을 모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예술적 표현 방법의 동시다발적 활용은 동시대의 많은 젊은 작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예술적 전략이기도 하다. 하비에르는 그들 중에서도 이러한 예술적 표현 방법들을 가장 세련되게 다루는 작가이다. 다만, 그 세련됨이 너무 지나쳐서, 관람객들이 아름다운 작품의 유혹에 취해 현대 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메시지를 읽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의 예술적 숙명이다.

 

글. 정현목 | 앨리스온 편집위원

 

  • 본 리뷰는 인천 트라이보울에서 2020년 7월 30일부터 8월 30일까지 진행된 《하비에르 마틴 : 보이지 않는, Blindness》 전시의 도록에 수록된 글을 재구성하여 발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