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가: ‘만드는 사람’에서 ‘의미의 승인자(Authorizer)’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빠르고 정교하게 이미지를 생성하는 시대가 되면서 예술가의 전통적 역할인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존재’라는 개념은 점점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 제작 행위가 기술적으로 대체 가능해지자, 예술가가 어디에서 고유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새롭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 예술가가 수행할 수 밖에 없는 역할이 무엇인지 탐구하며, 그 핵심을 예술적 형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승인하는 사람’으로 재정의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존 논의에서 혼재되어 온 독자(reader)로서의 성격, 의미 설계, 생산 시스템 설계, 지위 부여 등의 개념을 구분하고,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미적 생산과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예술적 승인 사이의 구조적 차이를 밝힌다.
기존의 예술 실천에서는 형식 생성과 예술적 판단이 하나의 행위로 연결되어 있었다. 예술가가 직접 작품을 만들고, 그 결과물은 그 자체로 예술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이러한 전제를 흔든다. 색채 조합이나 구성과 같은 형식적 차원에서 인공지능은 이미 충분한 생산 능력을 갖추었고, 앞으로도 그 능력은 더 고도화될 것이다. 반면 인공지능은 작품이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지를 판단하거나,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을 지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미적 생산과 예술적 승인은 분리될 필요가 있으며, 이때 예술적 승인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고유한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 개념에 따르면 창작자의 의도가 아닌 독자의 해석이 작품의 의미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개념을 인공지능 예술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바르트의 독자는 텍스트 결과물이 주어진 이후 그것을 해석하는 존재를 말하지만,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가는 단순히 해석을 넘어서 생산 조건을 설계하고, 대량으로 생성된 결과물 가운데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인하는 복합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독자성은 예술가 역할의 한 부분으로 재정의되어야 하며, 이를 기반으로 더 상위 단계의 의미 설계와 지위 부여 개념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예술가의 역할을 세 단계로 구조화한다. 첫 번째는 ‘생산 시스템 설계자’이다. 이는 언어 프롬프트 구성이나 알고리즘 규칙 설정 등 인공지능이 작동할 조건의 장을 설계하는 단계로, 제작의 중심이 결과물에서 조건 설계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기존 창작 개념을 확장한다. 두 번째는 ‘독자’로서의 역할이다. 인공지능은 수천 장의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이 감각적·정서적으로 의미를 지니는지는 인간만이 판단할 수 있다. 이 판단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예술사적 지식, 사회적 맥락, 시대정신 등 복합적 요소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창작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세 번째는 ‘지위 부여자’로서의 역할이다. 선택된 결과물에 제목을 붙이고, 어떤 매체에 담을 것인지를 결정하며, 전시나 출판을 통해 예술 제도 속에 편입시키는 행위들 전체가 여기에 속한다. 이 단계는 사회적·윤리적 책임을 수반하며, 인공지능이 수행할 수 없는 궁극적 승인 과정이다. ‘의미 설계자’란 이 세 가지 역할을 모두 포괄한다.
인공지능 예술에 대한 기존 논의는 인공지능에서 인간 예술가의 주체성을 강조하거나, 인공지능에 인간이 대체될 것을 걱정하거나, 인공지능이 주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인간 예술가의 생산 시스템 설계자, 독자, 지위 부여자로서의 역할에 가치가 있음을 주목하면, 인간 예술가의 고유함과 관련된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예술가는 언어 텍스트 즉 프롬프트나 알고리즘을 통해 우연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는 ‘장’을 설계한다. 이는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권위를 내려놓는 행위이자, 동시에 인공지능이라는 타자를 초청하는 행위이다. 인공지능이 쏟아내는 무수한 결과물 앞에서 예술가는 최초의 독자가 된다. 이 단계에서의 독서는 수동적 감상이 아니다. 수천 장의 이미지 중 인간의 감각과 공명하는 것을 선별하는 행위 자체가 창작의 핵심이 된다. 선별된 이미지에 맥락을 부여하고, 그것을 예술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는 최종 승인 단계로 지위를 부여한다.
과거에는 미적인 형식의 생성과 그것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예술가가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상황에서는 형식의 생산과 의미 판단이 동일한 주체 내부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형식적 이미지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이 둘은 더 이상 자동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 인공지능의 산출물은 통계적 패턴의 조합을 통해 생성된 시각적 형식의 결과물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인간적 경험이나 가치 판단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반면 인간은 고통·기쁨·죽음과 같은 1인칭 경험을 지닌 존재로서, 특정 형식의 결과물이 어떤 맥락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직접 살았던 삶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다. 예술적 의미는 물리적 결과물 대상 내부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경험 세계와 만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이 생성한 형식의 결과물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해석과 승인이라는 별도의 단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적 형식의 생산과 그 형식의 결과물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는 행위는 인공지능 시대에 분리된 두 기능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AICAN의 사례는 이러한 구조를 잘 보여준다. 작가이자 연구자인 Ahmed Elgammal은 AICAN을 설계하고 학습 구조를 구축했지만, 인공지능이 자율적으로 이미지를 생성한다고 해서 그의 예술가적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스템 설계자, 독자, 지위 부여자의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면서 예술가의 권위를 새롭게 행사한다. 그는 AICAN이 생성한 방대한 이미지 중 <Faceless Portrait of a Pope> (2019) 와 다른 이미지들을 선택하고, 그 이미지를 캔버스 프린트라는 물리적 매체로 변환했으며, 제목을 부여하고 전시에 출품함으로써 작품을 예술 제도에 편입했다. 이 과정은 기술적 판단을 넘어서, 예술적·역사적·사회적 가치 판단에 기초한 승인 행위였다. 즉 인공지능은 생산을 수행할 수 있지만,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역할로 남아 있다.
이러한 승인자의 역할이 인간에게 고유한 이유는 인공지능이 체험적 의식과 윤리적 책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고통이나 기쁨, 죽음과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하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의미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예술적 지위는 작품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예술적 승인 과정은 인간의 삶과 공동체 경험, 가치 판단에 기반하며, 이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결론적으로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가는 더 이상 단순한 제작자로 정의될 수 없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형식 가운데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지며, 예술 제도 속에서 그 의미를 승인하는 사람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예술가는 생산 시스템을 설계하고, 인공지능의 산출물을 읽어내며, 결과물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는 승인의 주체로서 인공지능과 협력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창작 주체성을 둘러싼 기존 논쟁을 넘어, 예술가의 독자성과 승인자의 역할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향후 관객의 독자성과 예술가의 독자성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예술 제도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글. 김다하.
Reference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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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kie, G. (2004). The new institutional theory of art. Aesthetics and the philosophy of art: the analytic tradition: an anthology, 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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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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