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승 〈이모르텔(Immortel)〉 : AI 컨트롤, 플라스틱, 알루미늄 프레임, 모터, LED 장치
이모르텔(Immortel)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묵직한 음압처럼 밀려오는 기운이다. 다소 위압적인 크기의 세로로 길게 솟은 검은 형상은 마치 오닉스를 세공한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들어진 외계의 존재 같다. 날카롭고 빛나면서도 동시에 어둡고 불투명한 표면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긴장을 발산한다. 외견상 큰 움직임은 없지만, 뾰족한 모서리로 중력을 이겨내며 균형을 잡고 지면에 살짝 닿아 반쯤 떠있는 그 상태만으로도 이미 어떤 ‘긴장’이나 ‘의지’가 깃들어 있는 존재임을 짐작하게 한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표면을 덮은 육면체의 조각들은 미세하고 어긋나게 들락날락하는데, 그 움직임은 이 구조물이 천천히, 어떤 종류의 리듬으로 호흡을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면과 닿은 지점을 중심으로 형체 주변에는 느린 파동처럼 흐르며 진동하는 장(field)이 펼쳐져 있다. 이모르텔이 발산하는 이 장의 영역에 관람자가 들어오면 장의 흐름이 관람자를 둘러싸고, 발 딛는 바닥 주위의 패턴이 왜곡되면서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변화는 관람자가 이모르텔이 인식하는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준다. 이모르텔은 조용히 머무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을 지속적으로 감각하고 신호를 수용하며, 표면의 맥박과 자신을 둘러싼 장의 흐름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중이다.

Q. 아티스트 토크에서 우주와 생명, 정보의 흐름을 언급했다.
A. 2016년부터 우주 공간과 생명체, 데이터를 주요 키워드로 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해왔다. 우주 공간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는 보이지 않는 매개와 에너지의 장이 존재한다.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 힉스 입자, 암흑물질 등에 관심을 가졌다. 더 나아가 ‘우주공간이 무수한 정보들과 그 흐름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는 관점1)에 영감을 받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생물, 무생물을 막론하고 저마다의 흔적을 데이터로 남기고,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주고 받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생명 현상 자체도 수많은 요소가 얽혀 만들어지는 거대한 과정이며, 특히 DNA의 복제와 전사로 이어지는 중심 원리(Central Dogma)를 통해 정보가 보존되고 발현되는 구조를 보면 그 복잡성이란 실로 엄청나다. 이렇게 우주 전체를 흐르며 일어나는 얽힘과 흐름, 그 가운데 존재하는 생명(life)이라는 키워드에 도달한 순간, 화두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Q. 왜 생명을 설계하려 하나? 어떤 생명인가?
A. 지금까지 문명은 인간의 시점과 감각 체계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왔다. 그러나 다음 단계의 생명은 설사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감각과 지각의 한계를 넘어선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을 알고 싶고, 거기에 다다르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인류라는 종의 ‘자의적 소멸’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기계가 인간의 진화에 관여할 수도 있고, 결국 생명의 계보는 어떻게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의 형태는 유지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구 밖 어딘가로 도달하여 다른 존재 양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다음 단계의 생명을 상상하며, 디지털 생명체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면모, 즉 고유한 리듬을 구현하기 위해 우선 디지털 맥박을 만들고자 했다. 이모르텝은 약 90개의 육각형 유닛들이 들락날락하는 운동을 통해 호흡의 파동을 생성한다. 단기적으로는 외부 클라우드의 API를 불러오는 방식이 아니라, 각 개체 내부에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반응하는 기초 수준의 의식을 탑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Q. 그러나 또한 생명은 군집이 아닌가?
2024년 부터는 군집 시스템(swarm system)을 시도하고 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벌, 개미 등의 군집은 여왕개미가 조종하는 게 아니다. 컨트롤 타워가 없는데도 군집이 모이면 ‘군집 지능’이 창발한다고 한다. 그러한 군집 지능 또한 진화한다. 포항문화재단의 지원으로 동빈문화창고 1969에서 진행된 《제6의 섬(Sixisles)》에서 〈초병들(Les Sentinelles)〉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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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스마트폰 등에서 추출한 이미지와 단어들을 분석하여 그것을 들숨과 날숨의 호흡으로 번역했다. 즉, 임의적으로 코딩된 노이즈 함수나 파동 함수의 결괏값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성향과 기억을 기계에 이식시키려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데이터가 아무리 축적되더라도 ‘통각의 통일’2)을 이루는 내적 자아가 복제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과학 및 인지과학에서 ‘생명’의 최소한의 기준은 자기 유지(self-maintenance)와 항상성(homeostasis)을 갖춘 체계이다.3) 즉, 저장과 기록의 축적만으로는 이러한 문턱에 도달하지 못한다. 언어와 이미지 등 매체를 통한 기억은 문화의 전승을 가능하게 하지만, 또한 그 자체로 생명을 구성하지 않는다.4) 그러나 이모르텔은 ‘완결된 생명체’라기보다는 ‘생명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다. 작가의 개인적 흔적에서 추출된 데이터가 번역된 기계 내부의 맥박은 자기 조직적 리듬이 태동하는 초기의 징후이며, 단순 반복을 수행하던 장치가 처음으로 호흡(impulse)에 가까운 운동을 획득하여 자기 유지의 항상성으로 나아가려는 점화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모르텔 주변에 펼쳐진 장(field) 역시 생리학적 기관 없이 알고리즘적 감각을 통해 환경을 감지하고, 이에 따라 리듬을 미세하게 조절하려는 징후일 수 있다.
넷플릭스 〈러브, 데스 + 로봇〉의 에피소드 지마 블루(Zima Blue)5)에서는 최고의 지성에 도달한 인공 생명체 예술가가 행성을 방랑하며 불멸의 신체와 인식의 경지를 얻다가, 마침내 작품의 한 가운데에 그리던 푸른 사각형을 거대한 단색 그림으로 발표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몸을 해체하여 가장 원초적이며 순수한 존재—질문 없이 반복만 수행하던 수영장 청소 로봇—으로 회귀된다. 그가 집착해 그려대던 푸른 사각형은 인식의 초기 단계에 기억했던 수영장 타일이었던 것이다. 이모르텔은 이와 정반대편의 지점일 수 있다. 즉 ‘끝점에서 다시 기원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닌 ‘기원에서 점화하는 순간’인 것이다. 우리는 거대하고 정적인 존재가 처음으로 숨을 얻는 장면, 단순 반복의 기계가 자기 조절성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화성인 날개(Martian Wing, 2021)〉, 군집 시스템을 다룬 〈레 썽띠넬(초병들) Les Sentinelles〉(2024)와 함께, 이모르텔은 작가가 생명이라는 화두를 획득한 이후 전개한 ‘우주–생명’ 프로젝트 속에서 새로운 존재 양식을 실험하는 하나의 실험체이다. 작가는 완성된 생명 시스템을 당장 구현하자는 것이 아니라 생명적 구조가 형성되기 직전의 임계 상태를 가시화함으로써, 기술이 결합된 생명 존재가 정보의 흐름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 안정성을 얻고 항상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을 제시한다.
1) 휠러(J. A. Wheeler)는 『Information, Physics, Quantum』(1989)에서 물리적 실재가 궁극적으로 정보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플로리디(L. Floridi)는 『The Philosophy of Information 』(2011)에서 현실을 정보적 존재자들과 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인포스피어(infosphere)’로 이해하는 정보 존재론을 제시했다.
2) 칸트(Immanuel Kant)는 『순수이성비판』(1781/1787)에서 표상이 단순히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통각의 통일(=일반적 자아의 자기 동일성)’ 아래에서 하나의 경험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인식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3) H. R. Maturana, F. J. Varela, Autopoiesis and Cognition: The Realization of the Living (1980) 등.
4) 스티글레르(B. Stiegler)는 『Technics and Time, 1』(1998)에서 언어/기록/디지털 매체 등 외부 장치에 보존되는 ‘3차 기억’이 문화와 경험의 조건을 형성하지만, 이는 의식 그 자체가 아니며 의식의 생물학적 및 내적 기억 구조(1차/2차 기억)를 대체하지 않는다고 본다.
5) R. Valley, dir. 2019. “Zima Blue.” Love, Death + Robots. Season 1, episode 14. Netflix. March 15, 2019.
행사개요
전시제목: 《감각 환경 Sensory Milieu》
참여작가: 구기정, 김윤철, 김형숙, 문창환, 정승, Zheng Da, Norimichi Hirakawa, Semiconductor
전시장소: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MAP)
전시일정: 2025. 9.16 – 2025.11.16
본 연재는 2025 광주 GMAP 디지털아트컬쳐랩 리서치랩 ‘아트라이터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