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에서 우리는 AI 실사화가 왜 기존의 실사화와 다른 매체적 효과를 만드는지를 살펴보았다. 만화의 시간성과 실사의 시각성이 공존하는 제3의 매체 범주라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매체적 가능성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되지 않는다. 숏폼 플랫폼에 범람하는 수많은 AI 실사화가 여전히 기술 시연의 층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동일한 기술적 조건 위에서 판타소너의 작업만이 정동의 영역에 도달했다면, 그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AI 실사화 콘텐츠의 현재 지형을 정리하면, 대략 세 개의 단계가 식별된다. 첫 번째는 기술 시연의 단계다. ‘AI로 이것을 만들 수 있다’라는 사실 자체가 콘텐츠의 존재 이유가 되는 국면이다. 인스타그램 릴스와 유튜브 쇼츠에서 가장 흔하게 마주하는 형태로, 감탄의 대상은 결과물이 아니라 기술이다. 1부에서 언급한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단계이며, 이 단계의 콘텐츠는 기술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순간 즉시 구식이 된다. 감탄의 유통기한이 기술의 갱신 주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매체적 안착의 단계다. AI 생성 이미지의 기술적 품질이 임계점을 넘어,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가 더 이상 감상의 장애물로 작동하지 않는 수준에 도달하는 국면. 이 단계에서 비로소 관객은 ‘AI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대신 콘텐츠 자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1부에서 논의한 AI 실사화의 매체적 특성인 물리적 관성으로부터의 자유, 만화적 시간성의 보존이 기술적 결함에 가려지지 않고 표현의 자원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현재 AI 영상 기술은 이 두 번째 단계에 막 진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동은 여기서도 아직 발생하지 않는다.
세 번째 단계, 창작적 전유(appropriation)의 단계에서 비로소 기술은 작품이 된다. 창작자가 AI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서사적, 편집적, 미학적 역량과 결합시키는 국면이다. 그것은 기술이 가능하게 한 것을 창작자가 의미 있게 만드는 단계이다. 판타소너의 슬램덩크가 기술 시연을 넘어 정동의 영역에 도달한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이 세 번째 단계를 가능하게 하는 창작자의 역량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두 번째 역량은 영상 매체에 대한 이해다. 매체의 문법과 구조에 대한 지식, 그리고 편집의 기술이 그것이다. 판타소너가 레이업슛 장면에서 수십 장의 연습 컷을 1초에 압축한 것은 몽타주 문법에 대한 체화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결정이다. 언제 컷을 빠르게 전환하고, 언제 한 장면에 머물며, 음악의 어떤 비트에 시각적 전환점을 일치시킬 것인가. 이것은 영상 편집의 오래된 장인적 역량이며, 에이젠슈테인이 몽타주 이론에서 정식화한 이래 영상 매체의 핵심 문법으로 기능해온 것이다. AI가 생성한 개별 장면의 품질이 아무리 높아도, 장면과 장면 사이의 리듬이 어긋나면 정동은 발생하지 않는다.
흑백요리사2의 애니메이션풍 오프닝과 클로징 영상이 흥미로웠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제작자는 일본 애니메이션 오프닝이라는 형식의 문법, 즉 달리는 주인공, 캐릭터 소개의 순서, 시선 처리, 타이틀 등장의 타이밍, 클라이맥스 전 정지 컷의 배치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AI 툴이 아무리 정교한 이미지를 생성하더라도, 이 형식적 문법에 대한 이해 없이는 ‘애니메이션 오프닝처럼 보이는 영상’은 만들 수 있어도 ‘애니메이션 오프닝으로 기능하는 영상’은 만들 수 없다.

세 번째 역량이 AI 툴에 대한 이해와 리터러시다. 어떤 프롬프트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각 툴의 강점과 한계는 무엇인지, 생성된 이미지들 사이의 시각적 일관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 숙련이다. 이것은 분명히 필요한 역량이며, 빠르게 진화하는 도구 환경에서 지속적인 학습을 요구하는 영역이다. 그런데 이 역량이 세 번째, 즉 마지막에 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현재 AI 창작을 둘러싼 담론의 상당 부분은 이 순서를 뒤집어놓고 있다. AI 툴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가 첫 번째 관심사가 되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prompt engineering)이 핵심 역량으로 부각되며, 원작에 대한 해석력이나 매체 문법에 대한 이해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벌어지고있다. 이 전도된 순서야말로 대부분의 AI 실사화 콘텐츠가 기술 시연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구조적 원인이다.
각 역량의 시간성(temporality)을 생각해보면 이 순서의 의미가 더 선명해진다. 원작에 대한 시각과 해석력은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다. 판타소너가 슬램덩크를 어떤 서사로 읽고 어떤 감정으로 기억하는가는 그 사람의 독서 이력, 감수성, 삶의 경험이 퇴적된 결과다. 영상 매체에 대한 이해와 편집적 역량은 수년 단위의 학습과 체화를 요구한다. 반면 AI 도구 리터러시(literacy)는 결코 쉽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습득 가능하며, 무엇보다 도구 자체가 빠르게 변한다. 오늘 숙련한 특정 툴의 조작법은 내일 업데이트로 무의미해질 수 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AI 시대에 창작자의 대체불가능성은 역설적으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역량에서 나온다. 그것은 텍스트를 깊이 읽는 능력, 서사의 감정 곡선을 자기 안에서 체화하는 감각, 매체 문법에 대한 장인적 이해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 퇴적층을 대신 쌓아줄 수는 없다. 느리게 축적되는 것만이 빠르게 대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창작자론에는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저자성(authorship)의 문제다. 판타소너의 작업이 높은 정동적 효과를 만들어낸 것은, 역설적으로 원작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백호, 서태웅, 산왕전이라는 기표들은(물론 한국 이름으로 번역한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너무 그 캐릭터성과 적절하게 맞아떨어져 그렇게 이해되고 있지만)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창조하고 수십 년간의 독자 경험이 축적시킨 문화적 기억의 인프라 위에서 작동한다. 판타소너가 완전히 오리지널 캐릭터와 서사로 AI 실사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면 동일한 수준의 정동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창작물의 정동적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원작자 이노우에의 것인가, 팬 창작자 판타소너의 것인가, AI라는 도구/매체의 것인가, 아니면 수십 년간 슬램덩크를 읽고 기억해온 집단적 팬덤의 것인가. 대답은 아마 이 모든 것의 교차점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교차점의 복잡성이, 기존의 저작자성 개념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새로운 창작 형태가 출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문제는 제도적 차원과도 맞닿아 있다. 판타소너의 작업은 법적으로 팬메이드, 즉 2차 창작물이다. 슬램덩크의 저작권은 이노우에 타케히코와 주식회사 슈에이샤(株式会社集英社)에 있으며, 팬메이드라는 형식이 이 저작권과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는 여전히 법적으로 불안정한 영역이다. 일본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산업은 전통적으로 팬 2차 창작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암묵적 합의를 유지해왔지만,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품질이 산업적 프로덕션에 근접하기 시작하면 이 합의의 경계도 재검토될 수밖에 없다. 칼럼에서 이 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필자의 역할이 아니지만, 이 새로운 창작 형태가 기존의 저작권 체계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

필자는 AI의 장르화를 지양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AI 아트’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범주화하는 것은 기술을 매체적 특성으로 환원시키는 오류이며, 창작의 다양한 맥락과 의도를 기술적 도구라는 단일 기준으로 묶어버리는 조잡한 분류라고 생각해왔다. 이 입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이번 경험은 그 입장에 분명한 균열을 남겼다. 적어도 만화 및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라는 특정 영역에서, AI는 기존의 어떤 제작 방식도 도달하지 못했던 매체적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있다. 만화의 시간성과 실사의 시각성을 동시에 품는 제3의 매체 공간, 산업적 프로덕션의 구조적 한계를 팬(fan) 창작자가 AI와의 협업으로 우회하는 새로운 생산 방식. 이것은 단순히 “AI로도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인이 아니라, AI가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고유한 표현 영역이 존재할 수 있다는 징후다.
이 균열을 단순한 예외로 봉합할 것인가, 아니면 AI 매체성에 대한 보다 정밀한 재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 혹은 이 경험 자체가 새로운 기술에 매혹된 순간의 과잉 해석이며, 시간이 지나면 뤼미에르의 기차처럼 감탄의 유통기한이 소진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판타소너의 슬램덩크 앞에서 내가 경험한 것이 기술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그 너머의 지점, 기억과 감정의 재활성화였다는 사실이다. 감탄은 휘발되지만, 정동은 남는다. 그리고 그 정동을 만든 것은 AI가 아니라, AI라는 매체 위에서 원작의 감정적 구문론을 재구축한 인간 창작자의 힘이었다. 기술은 가능성을 열지만, 가능성을 의미로 전환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다만 그 인간에게 요구되는 역량의 배치가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1부. 매체이식의 불가능성을 넘어서 – 슬램덩크 AI 팬무비
2부. 매체 이식의 불가능성을 넘어서 – 정동의 조건, AI 시대에 창작자는 무엇으로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