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찰이 필요한 자리에서: 앨리스온, 다음 걸음을 위하여

2004년에 앨리스온이 출발했을 때, ‘미디어 아트’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한국에서 번역이 필요한 말 그대로 생소한 ‘외래어’였습니다. 앨리스온의 유원준 초대 편집장이 그 시점에 수행한 역할은 본질적으로 소개(introduction)와 번역(translation)이었습니다. 이 새롭고 생소한 현상과 활동에 대해, 해외에서 일어나는 뉴미디어 아트 담론을 한국어로 가져오고, 한국에서 진행 중인 사건과 사람을 소개헀습니다.  이는 곧 이 낯선 예술 형식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는 활동이었습니다. 당시 아트센터 나비가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했다면, 앨리스온은 미디어 채널로서 국내에 펼쳐진 공백지를 메우고 연결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the wonderland)’처럼 두려움 없이 낯선 세계를 마주한 이 채널은 그 이름이 약속한 대로 움직였습니다. 앨리스온 어워즈를 통해 작가를 발굴하고, 공간 더미디엄(2010~2022)을 통해 물리적 접점을 만들며, 워크숍과 세미나와 강연으로 이해와 공유의 토대를 다져왔습니다. 그동안 앨리스온은 한국의 미디어 아트와 이를 포함하는 문화예술의 새롭고 실험적인 흐름을 정리하고, 그들을 동시대 시점에서 읽어 나가는 한편, 맥락을 연결하여 많은 이들이 접촉하고 접근할 수 있는 노드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26년 지금, 그 ‘소개자’로서의 역할은 구조적으로 소멸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디어 아트는 없다: 편재화라는 역설

이 말은 도발이라기보다 진단입니다. 서울의 거리에서 미디어 파사드가 도시의 표면을 뒤덮고, 몰입형 전시관이 천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기록하며, K-POP 무대 연출이 미디어 아트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울시는 공식적으로 미디어 아트 축제 서울라이트를 비롯해, 미디어 아트 전시 플랫폼을 광화문, 서울로, 해치마당에 상시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세종문화회관, KT와 조선일보 사옥 외벽은 미디어 파사드의 상설 캔버스가 되었습니다. ‘미디어 아트’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 외래어가 아닙니다. 너무 익숙한, 어쩌면 너무 많은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익숙함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리:스펙트 한국 미디어 아트 2000년 이후』(북코리아, 2024)의 발문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미디어 아트가 “폭넓게 다가왔지만 동시에 협소하게 접촉·이해되고 있다”고. 검색 엔진과 SNS에서 ‘미디어 아트’를 검색하면 등장하는 것의 대부분은 프로젝션 매핑, 미디어 파사드, 몰입형 체험입니다. 이것이 미디어 아트의 전부인 것처럼 소비됩니다. 문화예술의 역사와 흐름을 통해 획득한 미디어 아트의 범위와 의미는 축소되고, 교란되며, 고정되어 각자에게 박혀 있습니다.

미디어 아트가 너무 많아진 지금, ‘미디어 아트’라는 호명 자체가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미디어 아트인 시대에, 미디어 아트는 없습니다. 적어도, 그 이름이 한때 담지했던 기술의 막대한 영향력에 대한 반성과 비틀기를 통한 새로운 시선과 가능성의 타진이라는 힘은 스펙터클의 균질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용어의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비평적 인프라의 부재로 인한 문제입니다. 현상을 이름 붙이고, 맥락 짓고, 왜 이것이 중요하며 저것은 왜 문제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목소리가 희미해진 결과입니다.

용매의 시대, 마찰이 필요한 시간

저는 기술을 ‘용매(solvent)’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 용매는 다른 물질을 녹이고, 변환하고, 연결합니다. 디지털 기술이 그 이전에는 연결되지 못했던 것을 녹이고 변환하며 연결하여 더욱 많은 가능성을 현실화한다고 쓴 것은, 이 용매로서의 기술이 가진 변환력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그런데 2026년의 기술 환경은 그 용매의 농도가 전례 없이 짙어진 상태입니다. 생성형 AI는 이미지를, 텍스트를, 음악을, 영상을 생성합니다. 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매체’나 ‘도구’가 아니라 공동 행위자로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작의 기저에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디어 아트의 근간이었던 ‘기술을 사용하거나 탐구하는 예술’이라는 정의 자체를 흔드는 변화입니다. 기술이 용매로서 모든 것을 녹여 균질하게 만들 때, 형태는 사라집니다. 구별이 사라집니다.

여기에서 마찰(friction)이 필요합니다. 마찰이란 저항이자 접촉면에서 발생하는 열입니다. 용매가 모든 것을 녹여 매끄럽게 만드는 흐름에 대해, 거기서 무엇이 녹고 있는지를,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그 변환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감각하게 하는 힘입니다. 예술이 생성하는 마찰은 기술 이전의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과의 접촉면에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미디어 아트의 역사는 언제나 그 마찰의 역사였습니다. 백남준이 TV를 뒤집었을 때, 그것은 방송매체의 일방향적 권력에 대한 마찰이었고, 넷아트가 브라우저를 비틀었을 때, 그것은 인터넷의 유토피아적 서사에 대한 마찰이었습니다.

2026년, 우리에게 필요한 마찰은 무엇입니까? AI가 창작의 공동 행위자가 된 시대에, “이것은 누구의 예술인가?”라는 질문. 몰입형 스펙터클이 감각을 포화시키는 환경에서, “이 경험은 무엇을 가리고 있는가?”라는 질문. 모든 것이 연결되고 변환 가능한 시대에, “연결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며, 연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생성하는 것. 그것이 바로 비평의 자리이며, 앨리스온이 서야 할 자리일 것입니다.

다시 봄(Re:spect)에서 다시 풀어 나아감(Re:solve)으로

2023년, 아트센터 나비와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20인의 미디어 아트 작가와 함께, 20년의 시간선 위에서 그들의 여정을 작가 각자가 선택한 다섯 가지 결정적 순간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연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아카이브는 기록이 아니라 ‘다시 봄’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Re:spect — 라틴어 ‘-spect’가 담고 있는 ‘보다, 관찰하다’라는 의미 위에 ‘Re-‘를 붙인 것은,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감각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무엇이 있었는가”를 넘어 “왜 그것이 중요했으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 것. 20년간 앨리스온이 축적한 기록과 네트워크는 바로 그 질문의 재료가 됩니다.

그리고 이 ‘다시 봄’의 경험은 앨리스온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년간 소개자, 번역자, 연결자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그 역할이 구조적으로 변화한 현재를 인정하고, 다음의 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앨리스온의 다음 — 독립 비평·연구 채널

앨리스온은 이제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하고자 합니다. 이 재정의는 세 가지 축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앨리스온은 기술-매체 환경의 변동이 예술과 인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비평적으로 추적하는 독립 연구·비평 채널이다. 

앨리스온은 기술이 용매로서 우리의 감각과 인식, 창작과 관계를 녹이고 재구성하는 시대에, 그 변화의 접촉면에서 마찰을 생성한다. 

2004년 한국 최초의 미디어 아트 전문 채널로 출발하여, 20년간 축적한 현장 경험과 담론적 자산을 기반으로, 동시대 기술 조건 아래에서의 창작·비평·교육의 접점을 탐색해 온 역할을 지속한다. 

비평(Criticism)으로서의 앨리스온은 전시 소개와 뉴스 전달을 넘어, 기술-매체 환경의 변동이 예술적 주체성과 창작 조건, 감각 체계에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추적하고 발언합니다. 현상에 이름을 붙이고, 맥락을 짓고,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문제인지를 묻는 비평적 목소리를 유지합니다. 개별 전시와 작품에 대한 리뷰뿐만 아니라 기술이 예술의 조건 자체를 바꾸고 있는 구조적 변화에 대한 현상 비평과 이론적 탐색을 시도합니다.

아카이브(Archive)로서의 앨리스온은 20년간 축적한 기록을 단순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비평적 재맥락화의 자원으로 전환합니다. Re:spect 프로젝트가 그 시도의 주요 걸음이었으며, 앞으로는 아카이브된 전시, 작품, 작가, 사건에 비평적 프레임을 더하여, 한국 미디어 아트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담론적 자산을 구축해 나갑니다.

접속(Connection)으로서의 앨리스온은 텍스트에 머무르지 않고, 전시 기획, 세미나, 번역을 통해 담론을 물질화하고 확장합니다. 국내의 동시대 현상을 국제적 맥락과 연결하고, 해외의 이론적 자원을 한국어로 가져오며, 현장의 창작자와 연구자, 관객을 잇는 노드로서 기능합니다.

앨리스, 다시 걷는다

2004년의 앨리스는 낯선 세계를 향해 호기심과 용기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2026년의 앨리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종류의 용기입니다. 낯선 것을 소개하는 용기가 아니라, 이미 익숙해진 것을 다시 낯설게 만드는 용기. 모든 것이 미디어 아트인 시대에 “그래서 이것이 왜 중요한가?”를 묻는 용기. 마찰 없는 매끄러움이 우리의 감각을 잠재우는 환경에서, 거친 질문을 멈추지 않는 용기입니다.

미디어 아트의 작가들이 유희자이자 관찰자, 해석자이자 제안자로서 걸어온 것처럼, 앨리스온은 그들과 함께 비평자로서 그 곁을 걷겠습니다. 기술과 예술의 접촉면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감지하고, 기록하고, 언어화하는 일. 그 마찰의 열이 새로운 질문과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하며. 오늘의 미디어 아트에 대해, 아니, 기술이 더 이상 도구가 아니게 된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앨리스온은 여기에서, 다시 걷고자 합니다. 익숙해진 이름들 사이에서, 다시 질문이 시작되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aliceon.co.kr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