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야민이 사진과 영화의 민주화 가능성을 보았을 때, 동일한 매체는 나치 선전기계가 되었다. 백남준이 광대역 네트워크의 수평적 가능성을 보았을 때, 동일한 인프라는 플랫폼 독점의 기반이 되었다. 현재 소수의 기업이 전 지구적 커뮤니케이션 인프라를 장악했고, 그 위에서 작동하는 알고리즘은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며 인간의 주의력을 상품화했다. 백남준이 지적 오만함의 대가로 VHF 채널을 상업 자본에 넘겼다고 진단했던 구조가, 훨씬 더 큰 규모로 반복되었다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채널이 아니라 인프라 자체로 옮겨졌다.
SNS는 이 과정의 표면이다. 누구나 발화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는 약속과 함께 등장했지만, 실제로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참여 지표를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인스타그램, 틱톡, X에 올라오는 모든 포스팅을 볼 수 없다. 무한의 콘텐츠는 노이즈일 뿐이다. 그 곳에 등장하는 콘텐츠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맥락과 상황에서건 연결과 관계의 최소 제안이 필요하다. 그 끈을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알고리즘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장소에 모든 연결을 관장하는 자동화장치.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과 주의력 포획 기계의 현실이 동일한 플랫폼 위에서 공존한다. 벤야민의 아우라 분석을 다시 빌리면, SNS는 거리를 소멸시켰다. 그러나 그 소멸이 가져온 것은 비판적 독해 능력의 확장이 아니라 무한 스크롤을 통한 지각 분산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인공지능은 어디에 서 있을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계보에서 세 번째 반복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읽힐 수 있다. AI 역시 사진과 영화, TV처럼 해방의 언어로 도래했다. 지식의 민주화, 창작의 해방,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미 전례 없는 규모의 집중이 진행 중이다. Open AI, 앤트로픽, 구글과 xAI와 같은 소수의 테크 기업이 AI 인프라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 기업들이 훈련 데이터를, 모델 구조를, 인터페이스를 결정한다. 기술 해방론의 기울기, 해방의 가능성에 강하게 기울어져 있는 그 구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차이를 짚어야 한다. TV도, 인터넷도, SNS도 본질적으로는 (정보와 메시지의) 유통 인프라였다. 누가 채널을 가지는가, 누가 파이프를 소유하는가가 핵심 권력의 문제였다. 그러나 AI는 다르다. 1부에서 살펴본 에르자츠의 논리는 이제 전혀 다른 층위로 이동했다. 백남준이 말한 에르자츠는 이동을 대체하는 통신이었다. 물리적 행위의 대체재. 그러나 AI는 커뮤니케이션 인프라의 에르자츠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노동 자체의 에르자츠로 포지셔닝되고 있다. TV는 인간이 만든 콘텐츠를 방송했고, SNS는 인간이 만든 콘텐츠를 유통했지만, AI는 콘텐츠 자체를 생성한다. 텍스트를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코드를 짜고, 음악을 작곡한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 인프라의 통제 문제가 아니라 의미 생산 자체의 주체가 재편되는 문제다. 앞서서 필자는 에르자츠는 원본과의 간극을 전제한다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AI가 대체하는 원본은 무엇이며, 그 간극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는가.
연구자 케이트 크로퍼드(Kate Crawford)는 『AI 지도(Atlas of AI)』(2021)에서 AI를 해방 기술이 아니라 추출 산업으로 분석했다. 대규모 언어 모델을 훈련시키는 데이터는 어디서 오는가. 그 연산을 가능하게 하는 서버 팜은 누구의 땅 위에, 누구의 노동으로 운영되는가. 광대역 커뮤니케이션이 해방을 약속하면서 실제로는 인프라 독점을 심화했듯, AI의 해방 서사 이면에는 데이터 채굴, 자원 채굴, 그리고 저임금 주석(annotation) 노동이 있다. 랭던 위너가 말한 “인공물 안에 새겨진 정치”는 AI에서 훈련 데이터의 편향으로, 모델 설계 원칙으로, 접근권의 불균등 분배로 이미 구현되어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시간의 정치학이다. AI 담론의 주류는 이상하리만큼 먼 미래를 향해 있다. 수십 년 후의 초지능, 존재론적 위험, 문명의 종말 등. 이 미래 위험의 언어는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체계적으로 비가시화한다. 알고리즘이 채용 과정에서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것, 안면인식 기술이 특정 인종에게 더 높은 오류율을 보이는 것, 콘텐츠 조정 시스템이 특정 언어권 사용자를 불균등하게 검열하는 것 같은 문제들을 말이다. 이 현재의 피해들은 미래의 가상 위험을 논의하는 동안 유예된다. 벤야민이 파시즘의 현재를 직시했고, 백남준이 당대의 VHF 불평등을 고발했듯, 우리가 지금 보아야 하는 것은 AI가 가져올 먼 미래가 아니라 AI가 지금 이 순간 재생산하고 있는 불평등의 구조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 1974년의 백남준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의 예언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면, 독서는 기념식이 될 뿐이다. 2026년 지금, 그의 서거 20주기를 맞아 그를 기리는 자리들이 늘어나는 이 시점에, 기념과 다시읽기의 언어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념식은 과거를 완성된 것으로 폐쇄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는 시점을 염두에 둔 다시읽기는 과거를 현재의 질문으로 열어젖힐 수 있다.
백남준이 보았던 것보다, 그가 드러내지 못했던 것에 주목하는 독서가 필요하다. 그의 기울기, 해방의 가능성에 강하게 기울어진 시선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기술 해방론이라는 지적 전통이 구조적으로 반복해온 기울기다. 그 전통은 새로운 매체가 가져올 해방의 가능성에 집중하면서, 동일한 매체가 어떻게 기존의 권력 집중을 재편하고 심화할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매번 미루어왔다. 벤야민이 예외적으로 이 이중성을 붙잡았지만, 그것은 전통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백남준은 1974년에 “21세기까지 26년밖에 남지 않았다”며 지금 당장 기획을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리에게는 그가 촉구했던 그 미래가 이미 도래했다. 그리고 그 미래의 한복판에서 또 다른 기로가 펼쳐지고 있다. AI 인프라가 설계되고 배분되는 방식이 결정되는 지금, 우리는 또다시 그 기획의 시간 앞에 서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누구에게나 막연할 것이다. 지금 이 변화의 속도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 이 질문을 공유하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이 1974년이 아닌 지금 우리의 것임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지금 백남준을 다시 읽는 이유이고, 동시에 그 독서가 기념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한 조건일 것이다.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aliceon.co.kr 편집장
1부: 1974년의 한 제안서 – 백남준을 다시 읽는다는 것: MEDIA PLANNING FOR THE POST INDUSTRIAL AG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