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창작, 매끄러움 아래의 조건을 묻다 – 민복기, 허대찬

판단의 조건: 생성형 AI 이후 맥락을 설계하고 책임지는 법, 서울대학교 문화예술원 「인문·예술·AI 융합 콘텐츠 리더십 과정」, 2026. 6.29.

서울대학교 인문·예술 AI 융합 콘텐츠 리더십 과정에서 진행한 특강 이후, 금속공예가이자 서울대학교 교수인 민복기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공개질의를 받았습니다. 질문은 미디어아트를 “기술이 우리 삶과 인식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묻는 예술”로 바라본 강의의 한 대목에서 출발했습니다. 민복기 선생님은 음악과 소리, 사진과 렌즈, 영화와 기술을 둘러싼 세 가지 장면을 통해, 매체와 기술에 대한 몰두가 언제 예술 바깥으로 밀려나는지, 또 언제 예술적 질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이 글은 그 질문과 답변의 기록입니다. AI를 더 빠르고 매끄럽게 사용하는 법이 아니라, AI라는 매체가 우리의 감각과 판단, 창작의 조건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기 위한 대화입니다.


 

허대찬 선생님, 강의 잘 들었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오늘 여쭙는 질문은 저 혼자의 궁금증이라기보다 우리 과정에서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 수강생들과도 공유하는 공개질의로 드리려 합니다. 저는 금속공예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미디어아트를 ‘기술이 우리 삶과 인식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묻는 예술’, 곧 기술로부터 예술적 질문이 시작될 수 있다고 정의해주신 대목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공예 역시 재료와 도구, 즉 매체와 가장 가까이서 씨름하는 일이라, 그 정의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인상을 실마리 삼아, 오래 품고 있던 세 장면을 말씀드리며 질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좋은 명반을 두고 기악을 전공하는 음대 유학생과 하이엔드 오디오 애호가가 나누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같은 음반을 이야기하는 듯했는데, 애호가의 말은 자연스럽게 연주의 해석보다 녹음의 질감과 공간의 울림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음대생이 조금 시니컬하게 말하더군요. “선생님은 음악보다 소리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네요.” 음대생에게 소리는 음악에 봉사하는 수단이었고, 애호가에게는 소리 그 자체가 이미 감상의 대상이었던 셈입니다.

둘째, 어느 사진전에서 한 애호가가 전시중인 작가에게 자신의 빈티지 카메라와 렌즈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전시한 프로 사진작가는 소박한 장비를 썼는데, 이 사진애호가는 여러 카메라기종의 색감이나 선예도의 다양성을 음미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여기에서도 사진작가는 카메라는 결국 표현의 도구일 뿐이라는 취지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저는 이 애호가는 ‘사진’의 이미지가 아니라 ‘카메라라는 광학 장치를 통과하는 빛’ 그 자체에 대해 예술적 관심을 가진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셋째, 영화 이야기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과 아바타로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기술의 최전선을 매번 새로 그은 감독입니다. 그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릇을 담는 기술 자체를 발명하다시피 해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영화를 두고 국내의 한 영화감독은 “서두만 조금 보다 지루해서 나왔다”고 매우 시니컬하게 말했습니다. 압도적인 화면과 기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카메론의 영화는 인간과 서사의 깊이를 파고드는 예술이라기보다 기술의 스펙터클을 과시하는 오락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정점에 올라도, 그것이 전면에 나서는 순간 이미 예술의 자리에서 미끄러진다고 본 셈입니다.

세 장면에서 음대생·사진작가·영화감독은 하나같이 매체와 기술에의 몰두를 예술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여기에는 전통미학의 오래된 태도가 있다고 느낍니다. 매체는 예술혼과 미감에 봉사하는 수단이어야 하고, 그 수단이 도드라지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는 태도 말입니다. 소리도, 렌즈도, 특수효과도 그 자체로 감상되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투명하게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공예에 대해서도 이런 목소리는 익숙합니다. 기법이나 재료가 ‘튀면’ 기교의 과시로 떨어진다는 오래된 경계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강의를 들으며, 미디어아트는 매체를 이와 조금 다르게 대한다고 느꼈습니다. 백남준이 방송 신호에 자석을 갖다 대 화면을 일그러뜨렸을 때, 그것은 일그러진 화면의 이미지만 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미감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혹은 무엇일 수 있는가’를 예술적으로 되묻는 행위였으니까요. 매체를 투명한 수단으로 부리는 대신, 매체가 우리의 지각과 세계를 어떻게 조건 짓는지를 드러내는 것 — 그 태도의 차이가 인상 깊었습니다. 강사님의 정의처럼, 기술과 매체가 예술적 질문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미디어아트가 늘 매체를 ‘드러내는’ 쪽으로만 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매체성에는 여러 결이 있고, 수용자가 매체를 잊을 만큼 매끄러워지려는 비매개의 지향 역시 그중 하나로 꾸준히 시도될 것입니다.
다만 제 관심은 어느 방향이 옳은가가 아니라, 매체를 대하는 태도 자체에 있습니다. 전통미학이 매체를 ‘사라져야 할 수단’으로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면, 미디어아트는 그것을 드러내든 감추든 언제나 ‘질문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는 것처럼 보입니다. 매체는 부려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유되고 감상되고 되물어질 수 있는 무엇이라는 태도지요.

그래서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매체를 대하는 미디어아트의 다른 태도가, AI를 기반으로 창작하려는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수 있겠습니까? AI 창작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AI로 무엇을 더 잘, 더 매끄럽게 만들 것인가’를 묻습니다. 이는 매체를 투명한 수단으로 보는 전통적 태도의 연장으로 느껴집니다. 반면 미디어아트가 매체를 대하는 태도를 이어받는다면, 우리는 ‘AI라는 이 매체가 우리의 지각과 창작과 판단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를 함께 물으며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 강의의 표현을 빌리면, 조건을 감각 속에 녹여 사라지게 하기보다 그 조건을 다룰 수 있는 자리에 두는 태도와도 닿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미디어아트가 반세기 동안 전통미학과 긴장하며 축적해온 이 ‘매체를 되묻는 태도’가, AI 기반 창작에 구체적으로 어떤 감각과 방법을 물려줄 수 있을지 —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민복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 교수



질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여러 번 읽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장면을 먼저 깔아주셨고, 그 장면들에서 끌어낸 구도가 이미 답의 절반을 품고 있어서 저는 남은 절반을 보태는 한편 그 구도를 조금 더 벌려보는 작업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말씀하신 세 장면이 현장성있게 다가오네요. 우선 그 장면들을 살펴보면 음대생, 사진작가, 영화감독은 모두 매체와 기술에 대한 몰두를 예술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밀어낸 자리는 제가 언급한 미디어아트의 자리와 같지 않습니다. 오디오 애호가는 소리를 사랑하지만, 소리가 청취를 어떻게 조건 짓는지 묻지는 않습니다. 카메라 애호가는 렌즈를 지나는 빛을 음미하지만, 광학 장치가 우리의 봄 자체를 어떻게 만들어왔는지 심문하지는 않습니다. 

음악보다 소리, 사진보다 렌즈, 영화보다 기술에 관심을 두는 태도는 예술의 본령에서 벗어난 것처럼 여겨집니다. 여기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매체는 예술혼이나 미감, 표현과 서사에 봉사해야 하며, 너무 앞에 나서면 본말이 전도된다는 오래된 감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을 더해보고 싶습니다. 매체를 투명한 수단으로 보는 태도와, 매체 자체를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 그리고 매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세우는 태도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오디오 애호가는 소리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 애호가는 렌즈를 지나는 빛의 질감과 색을 섬세하게 음미할 수 있습니다. 카메론은 영화라는 매체가 도달할 기술의 최전선을 매번 새로 그었지만, 그 최전선의 기술 자체가 관객의 지각을 어떻게 재편하는지 스스로 되묻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미디어아트적 태도와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매체를 감상하는 것과 매체를 되묻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매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나 질감을 즐기는 일에 가깝고, 후자는 그 매체가 우리의 감각과 판단, 세계 이해를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묻는 일에 가깝습니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의 애호가라기보다, 텔레비전을 짓궂게 몰아세우며 질문의 대상으로 세운 사람에 가깝습니다. 자석으로 화면을 일그러뜨린 행위는 단순히 흥미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방송 신호라는 일방향 체제에 작가의 손이 개입할 수 있는가, 시청자는 주어진 이미지를 그저 받아들이는 존재인가, 텔레비전이라는 장치는 과연 무엇일 수 있는가를 묻는 교란이었습니다. 매체가 투명하게 뒤로 물러나는 대신, 매체 자체가 예술적 사유의 표면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이 구분이 AI 시대에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AI 주변에는 이미 두 번째 태도, 곧 매체 자체를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넘쳐납니다. 모델의 성능을 비교하고, 생성 결과의 정교함을 감탄하고, 프롬프트를 장인적으로 다듬고, 특정 모델이 만들어내는 화풍이나 말투의 차이를 즐기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최근 영화 <와일드 씽> 속 캐릭터 최성곤이 부른 ‘니가 좋아’를 두고, 원곡의 장르와 창법을 바꾸는 AI 생성 버전들이 트로트에서 유로비트, 제이팝, 요들송에 이르기까지 쏟아져 나오며 큰 호응을 얻은 일도 같은 결의 몰두입니다. 물론 이런 몰두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때로 오디오 애호가나 카메라 애호가의 몰두와 닮아 있습니다. 매체에 매우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 매체가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는 충분히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디어아트가 AI 창작에 물려줄 수 있는 중요한 감각 중 하나가 바로 이 몰두를 세 번째 태도로 옮겨내는 일입니다. AI를 잘 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AI가 우리의 감각과 판단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묻는 일입니다. AI로 무엇을 더 빠르게, 더 자연스럽게, 더 완성도 있게 만들 수 있는가를 묻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질문만으로는 AI가 투명한 도구로 남습니다. 반대로 AI를 매체로 본다면 질문은 달라집니다. AI는 내가 무엇을 창작할 수 있게 해주는가. 동시에 내가 무엇을 창작할 만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가. 나의 취향을 확장하는가, 아니면 이미 학습된 평균적 취향 쪽으로 부드럽게 끌고 가는가. 내가 판단한다고 생각한 순간 중 어디까지가 모델의 추천, 데이터의 분포, 인터페이스의 유도, 플랫폼의 정책에 의해 이미 조건 지어져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가능해집니다.

AI 앞에서 이 이동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많은 AI 서비스는 사용자가 매체를 잊게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대화, 매끄러운 생성, 이질감 없는 인터페이스, 빠른 결과값이 좋은 제품 경험으로 제시됩니다. 말하자면 매체가 지각되지 않는 상태 자체가 목표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감각 속에 녹아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판단의 자리입니다. 무엇이 학습되었고 무엇이 배제되었는지, 누구의 노동과 어떤 자원이 이 매끄러움을 떠받치는지, 어떤 기준으로 결과가 추천되고 걸러지는지를 물을 자리가 닫힐 때, 우리는 도구를 부리는 자리에서 도구의 판단을 승인하는 자리로 조금씩 밀려납니다.

그래서 AI 시대에 매체를 되묻는 태도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AI를 신기한 도구로 잘 활용하는 것과, AI가 나의 창작과 판단을 어떤 방식으로 재배치하는지 살피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가 숙련의 문제라면, 후자는 비평적 감각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요? 라는 질문으로 이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몇 가지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떤 작가들은 데이터셋을 완성된 서비스 뒤에 숨은 기반이 아니라 작업의 재료로 다룹니다. 이미지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제외하는 과정을 작업의 표면으로 끌어올려, 매끄러운 생성 결과 뒤에 있는 축적과 배제의 구조를 보이게 합니다. 또 어떤 작가들은 기계의 오인식과 오류를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만 보지 않고, 모델이 세계를 분류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순간으로 붙듭니다. 자석이 텔레비전 신호에 개입했듯, 오늘의 작가들은 모델의 분류 체계와 생성 과정의 이음매가 벌어지는 지점에 개입합니다. 또 어떤 작업은 하나의 AI 응답 뒤에 놓인 채굴, 서버, 노동, 에너지, 저작권, 플랫폼의 사슬을 드러내며, 화면 위의 가벼운 결과가 사실은 얼마나 무거운 물질적 구조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작업들은 AI를 잘 사용하고 부리는 기술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AI라는 매체가 우리를 어떻게 조건 짓는지를 다시 다룰 수 있는 자리에 둡니다. 이것이 미디어아트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중요한 방법입니다. 매체를 투명한 도구로만 쓰지 않고, 매체가 만들어내는 조건을 다시 감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이제 선생님의 공예 이야기로 돌아가보려 합니다. 공예는 매체가 투명한 수단으로만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몸으로 다뤄온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금속은 만드는 이의 뜻을 순순히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두드리면 되받아치고, 열을 가하면 성질을 드러내며, 표면과 무게와 강도와 산화의 조건 속에서 계속 저항합니다. 공예가는 재료를 사라지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재료의 저항과 협상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 과정에서 ‘손’은 단순한 실행 기관이 아니라 판단의 기관이 됩니다.

이 점에서 공예의 감각은 AI 시대에 매우 중요합니다. AI는 모든 것을 손쉽고 매끄럽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발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매끄러움 속에서 무엇인가 사라집니다. 시행착오, 저항, 반발, 재료와의 협상, 판단의 지연 같은 것들이 사라집니다. 금속을 다루는 손은 그런 사라짐에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료가 너무 순순히 말을 들을 때 오히려 의심하는 감각. 표면이 지나치게 매끄러울 때 그 아래의 조건을 묻는 감각이 공예 안에는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디어아트가 AI 창작에 물려줄 수 있는 감각을 ‘마찰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마찰은 단순한 불편함이나 오류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알아차리게 하는 순간입니다. AI가 너무 쉽게 답을 내놓을 때, 그 쉬움이 무엇을 생략했는지 묻는 것. AI가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 때, 그 그럴듯함이 어떤 평균과 취향 위에서 구성되었는지 살피는 것. AI가 나의 판단을 대신해주는 것처럼 보일 때, 어디까지가 도움이고 어디서부터가 위임인지 다시 가르는 것. 저는 이런 감각이 AI 시대의 창작에서 점점 더 중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미디어아트의 동시대적 기능은 단지 새로운 기술을 예술 안으로 가져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의 삶과 감각, 노동과 판단을 조직하고 있는 기술의 조건을 다시 감각 가능한 자리로 돌려놓는 데 있습니다. 기술을 숭배하지도 않고,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 축소하지도 않으면서, 그 기술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지 묻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아트는 AI를 잘 사용하는 방법만이 아니라, AI가 우리의 창작과 판단을 어떻게 재배치하고 있는지를 묻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이 지점에서 공예는 미디어아트에게서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배워야 하는 분야가 아닙니다. 오히려 공예는 이미 오래전부터 재료의 저항과 마찰을 몸으로 사유해온 분야입니다. 금속을 다루는 손은 재료가 순순히 통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표면, 무게, 강도, 열, 산화, 반발의 조건 속에서 손은 계속 판단을 조정합니다. 그래서 공예의 손은 단순한 실행 기관이 아니라 판단의 기관입니다. 이 감각은 AI가 모든 과정을 매끄럽고 즉각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설계될수록 더욱 중요해집니다. 재료의 되받아침을 아는 손은, 저항이 사라진 듯 보이는 환경에서 오히려 가장 먼저 이물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미디어아트는 그 이물감을 개인적 감각이나 제작상의 경험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공예가 물질, 기법, 손, 제작 과정 속에서 마찰을 경험해왔다면, 미디어아트는 그 마찰의 자리를 데이터, 모델, 인터페이스, 플랫폼, 인식 조건의 차원으로 확장해 묻는 언어를 제공합니다. 다시 말해 공예가 재료의 저항을 통해 판단을 배워왔다면, 미디어아트는 동시대 기술 환경 속에서 무엇이 우리의 판단을 대신하고, 무엇이 감각되지 않게 사라지는지를 묻도록 합니다. 두 분야는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갖지만, AI 시대에는 바로 이 마찰의 감각을 통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AI 창작의 질문은 “AI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AI와 함께 만들 때 인간의 감각은 어떻게 바뀌는가”, “창작자의 판단은 어디에 남는가”, “기술이 대신한 것은 무엇이고 여전히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매체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조건을 어떻게 다시 감각 가능한 자리로 가져올 것인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해주신 표현을 빌리면, AI를 투명한 수단으로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AI라는 매체 자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세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아트가 AI 기반 창작에 열어주는 새로운 시야는 기술을 더 잘 쓰는 법에만 있지 않습니다. 기술이 우리의 감각과 판단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되묻는 법에 있습니다. 그리고 공예는 그 질문 앞에서 결코 주변부에 있지 않습니다. 재료의 저항을 알고, 손의 판단을 알고, 매끄러움 아래의 조건을 감지해온 분야로서 공예는 AI 시대의 창작이 잃기 쉬운 마찰의 감각을 다시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 이물감을 버리지 않고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 저는 AI 기반 창작의 중요한 가능성이 바로 그 접점에서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이 워낙 중요하고 저에게도 생각할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보니 서술이 길어졌습니다. 내용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허대찬 –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