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안에서 끝까지 환원되지 않는 것 – 한국미술경영학회 2026 춘계 심포지엄 라운드테이블

이지현 공동대표가 한국미술경영학회 2026 춘계 심포지엄 「돌봄과 인공지능 그리고 예술노동」에서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발표는 인공지능 기술과 예술노동, 돌봄의 관계를 중심으로 동시대 예술 현장의 변화와 쟁점을 다루었다. 한국미술경영학회 2026 춘계 심포지엄, 2026. 사진: 허대찬.

2026년 5월 29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 SeMA홀. 한국미술경영학회 춘계 심포지엄 《플랫폼과 인공지능 그리고 예술노동: 창작, 매개, 유통의 재편과 권리》의 마지막 세션인 라운드테이블 좌장을 맡았다. 원래 1시간 20분 분량으로 설계된 자리였으나, 앞선 세션의 지연으로 실제 진행 시간은 40분 남짓. 아쉽게도 원래 설계했던 개별질문은 진행할 수 없었고 대신 공통 질문 두 개와 객석 Q&A만 가능했다. 그럼에도 오래 남을 이야기들이 자리했고, 남았다. 그 압축된 시간 안에 오간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날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진행된 발표는 각자의 위치에서 출발했지만, 라운드테이블에 도달하면서 공통의 대지에 함께 서 있음을 발견했다. 김태훈(서강대)은 벤야민의 기계복제 논의를 생성형 AI 환경으로 다시 읽으며 ‘전시가치’에서 ‘플랫폼 가치’로의 이동을 짚었다. 원본성보다 생성 조건과 책임의 배분이 중요해지는 지금은, 아우라의 소멸이 아니라 그 근거의 이동이라는 진단이었다.

이슬기(한국문화관광연구원)는 예술노동의 불안정성이 플랫폼이나 AI로 인해 새롭게 생긴 문제가 아님을 실증 데이터로 제시했다. 프로젝트 기반 일감 구조와 예술생태계 내부의 게이트키핑 속에서 불안정성은 이미 반복 생산되어왔다. 원인이 기술이 아니라 구조라면, 기술이 바뀌어도 불안정성은 그대로다. 이지현(널위한문화예술)은 160만 구독자 기반의 콘텐츠 플랫폼을 운영한 경험에서 데이터 기반 템플릿화의 양면성을 이야기했다. 예술의 다양성을 평준화할 위험과 작가의 디지털 존재감을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가능성이 동일한 구조에서 발생함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윤정(독립 큐레이터, 플로우앤비트)은 독립 큐레이터가 제도 밖 비판적 실천자에서 공공성·행정·예산·네트워크를 함께 수행하는 매개자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을, 복수의 인터뷰를 통해 세밀하게 드러냈다. 보이지 않는 큐레이터리얼 노동이 어떻게 비용으로 인정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결인 상황이다. 손희민(시각예술가)은 공모·플랫폼·시장이 요구하는 ‘마침표’ 속에서 예술가가 지켜야 하는 ‘물음표’를 이야기했다. 마침표가 가득한 생태계에서 물음표가 사라지면 생태계 자체가 닫혀버린다라는 작가의 관점에서 드러낸 치명적 부분이었다. 조현지(국립현대미술관)는 모라의 ‘배움 지우기’와 헤르더의 ‘어둠’ 개념을 경유해, 예술교육은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감각과 함께 머무르는 과정임을 제안했다.

어둠을 없애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어둠과 함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라는 역전. 이 한 문장이 오후 내내 가장 오래 남았다.

 

첫 번째 공통 질문을 이렇게 열었다. “플랫폼은 새로운 공공장인가, 새로운 게이트피커인가.” 오늘 발표들에서 플랫폼은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가진 장치로 등장했다. 작가에게 관객과 팬덤, 제도권 진입의 우회로를 제공하는 한편, 조회수·알고리즘·템플릿·평균적 취향을 통해 예술의 형식과 언어를 조정한다. 예술 생태계의 새로운 공공장인가, 아니면 더 강력하지만 덜 보이는 게이트키퍼인가.

김태훈은 단호했다. 플랫폼은 자본가가 만든 결과물이고 숨은 의도가 내재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AI가 붙으면 문제가 가중된다. 의도를 숨긴 주체 위에, 속내를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겹쳐지면 플랫폼 사용자는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이슬기는 좀 더 복합적인 진단을 내놓았다. 접근성을 낮춘다는 측면에서 플랫폼은 유효하다. 그러나 산업과 자본주의의 속성을 피할 수 없고, 조회수 같은 지표는 결국 돈을 끌어오는 논리다. 긴장 관계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신진 예술가이거나 비주류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다. 정부만의 해결이 아니라 학회·현장·연구자·기업이 함께 규칙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제안도 덧붙였다. 이지현은 플랫폼이 예술가의 도덕적 감각을 앞지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서비스가 너무 빠르게 출시되다 보니,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는지조차 감각하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교육적·도덕적 업데이트가 지금 가장 시급하다. 고윤정은 플랫폼은 새로운 제도권이다 라는 견해를 밝혔다. 결과 위주로 재편되는 구조에서 증빙되기 어려운 과정은 탈락하고, 그 탈락이 예술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여러 발언을 받아 정리하면서 한 질문을 닫았다. 이제 우리는 플랫폼과 단절될 수 없다. 워낙 일상의 공간과 겹쳐 있고, 그것이 주는 이점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해를 전제한 줄타기, 즉 플랫폼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플랫폼에 사용되지 않으려는 경계를 의식하는 노동에 대한 감각을 체득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답이 아닐까 라고.

 

두 번째 질문은 ‘공공지원은 물음표와 어둠을 지원할 수 있는가’ 였다. 이날의 논의 전체를 묶는 두 키워드, ‘물음표’와 ‘어둠’에서 출발한 화두였다. 공공지원은 대체로 계획·성과·명료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술의 중요한 부분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것, 실패 중인 것, 나중에야 의미가 생기는 것 안에 있다. 공공기관과 정책은 이 미완의 시간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손희민은 올해 초 청년 창작자 대상 지원 사업 공고가 나왔을 때, 처음엔 기대했다고 했다. 사전 설명에서 강조된 것이 ‘뭘 할지 미리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결과는 기존 공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창작자에게 쓰임새를 묻지 않는 지원,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는 바람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만큼 지원 규모가 큰 나라가 없다는 말도 들었다며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자조도 있었지만, 그 발언 이면에 담긴 것은 분명했다.

조현지는 미술관 교육 현장 이야기를 꺼냈다. 도슨트들의 활동 지원 사업에서 단순히 작품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교육 프로그램의 완결성 자체를 조금씩 부수는 방향을 실험하고 있다. 작품 앞에서 발생하는 설명되지 않는 반응들을 성급히 해소하지 않는 것, 그것도 교육의 형식일 수 있다. 이슬기는 구조적 문제로 답을 넓혔다. 가장 이상적인 재원은 향유자들이 직접 돈을 지불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그 지불 의향 자체가 낮고 공공지원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결국 공공·민간 재원의 다각화가 필요하고, 그것은 문체부 단독의 의제가 아니라 재정 당국과의 협력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문제다. K아츠 지원 사업의 설계 의도는 ‘용처 없는 지원’이었지만, 정부 사업이 의사결정 구조를 통과하면서 예술생태계에 맞지 않는 요소들이 필연적으로 붙었다. 이것도 솔직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결국 이 질문은 지원의 규모나 제도의 효율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가치 있는 활동으로 인정할 것인가에 더 가까웠다. 공공지원은 대체로 결과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작품이 만들어졌는가, 전시가 열렸는가, 몇 명이 관람했는가, 어떤 성과가 발생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이날 발표와 토론에서 반복해서 등장한 것은 결과 이전의 시간이었다. 작가가 붙들고 있는 미완의 질문, 큐레이터의 리서치와 만남, 교육 현장에서 뒤늦게 도착하는 이해, 아직 어떤 결과로도 환원되지 않은 시행착오와 탐색의 시간 말이다.

물음표와 어둠을 지원한다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 시간을 지원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상태, 설명되지 않은 감각, 실패할 가능성까지 포함한 시간을 어떻게 공적 언어 안에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날 토론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질문의 중요성만큼은 공유하고 있었다.

 

객석 Q&A에서는 아쉬웠던 지점, 개별 Q&A에 담아 놓았던 질문이 등장하여 다소 부족했던 논의를 풍성하게 확장해 주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 전문사 과정의 강성욱이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예술노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순적이지 않은가. 예술이 무언가를 생산하고 그것이 보여질 수 있는 것인지, 예술과 노동이 정말 같은 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인지를 묻는 발언이었다.

손희민의 대답이 단번에 공기를 바꿨다. 실제 작업을 할 때 건설 현장 노동자와 다를 바 없이 있다고. 하루 종일 육체를 쓰고 근육을 풀기 위해 맥주를 마시면서 친구들과 “노동자”라고 부른다고. 그게 뭐 다른 말이 필요한가. 고윤정은 독립 큐레이터에 관한 발표 자체가 이미 그 대답이라고 했다. 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쓴 글이었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들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그 생각을 끊을 수 없다는 게 노동이 아니면 뭐냐고.

이슬기는 이론적 맥락으로 답변을 확장했다. 구본주 작가가 사망했을 때 사망보험금 산정 쟁점이 된 사례를 언급했다. 그전까지 예술가는 노동자 개념에 편입되지 않았고, 일용직 임금 기준으로 산정됐다. 이것이 재판까지 이어지면서 ‘예술가는 노동자인가’라는 물음에 불이 붙었다. 노동 경제학·노동 사회학에서 노동 개념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 비물질 노동, 돌봄 노동이 그 논의 안에 편입됐다. 예술이 노동이 아닌 이유를 대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다. 이어 김태훈은 개발자 업계의 포괄임금제 이야기로 비유를 댔다. 야근을 시간 단위로 다 보상하면 비용이 두 배가 되니 연간 결과물로 산정하는 방식이 나온 것처럼, 예술 노동도 투입 시간 대비 아웃풋으로 단순 산정하기 어렵다. 즉 다른 틀이 필요하다라는 관점을 공유했다.

두 번째 객석 질문은 미술 대중화의 양가성에 관한 것이었다. 론 뮤익과 데미언 허스트와 같은 상업적 대형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예시를 들며, 플랫폼과 대형 전시가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예술의 고유성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지현은 이에 대해 원칙이나 기준을 이야기하기보다, 자신들이 창작자와 맺어온 관계를 이야기했다. 전시를 함께 만들고, 오프닝에 가고, 술을 마시고, 때로는 갈등도 겪으면서 현장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비슷한 아이디어와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한 플랫폼들 사이의 차이를 만든 것은 기술이나 자본보다 창작자와의 거리였다고 그는 말했다. 결국 대중화와 예술성 사이의 균형은 추상적 원칙보다도 창작자와 얼마나 가까운 위치에서 함께 고민하는가의 문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오늘의 핵심 질문은 기술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었다. 이동 중인 가치를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오래된 구조의 증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경계를 의식하는 노동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를 묻는 자리였다. 독립 큐레이터의 리서치와 조율, 작가가 붙잡고 있는 물음표, 교육 현장에서 뒤늦게 작동하는 배움. 이것들은 수치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시간이야말로 예술 생태계를 지속하는 핵심 노동이다. 여섯 개의 발표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술 안에서 끝까지 환원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다른 질문도 던져보고 싶었다. 최근 아티스틱 리서치(artistic research)의 제도화 과정은 물음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어떻게 다시 물음표를 마침표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AI 역시 비슷하다. 최근 추론 모델의 발전은 더 많은 답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엇이 누락되고 무엇이 탈락하는가를 더욱 정교하게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예술과 AI를 둘러싼 오늘의 논의는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끝까지 설명하지 않은 채 남겨둘 것인가.

 


2026년 5월 29일 한국미술경영학회 2026 춘계 학술 심포지엄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 B1층 SeMA홀에서 진행되었다.
라운드테이블 발표자: 김태훈(서강대학교), 이슬기(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지현(널위한문화예술), 고윤정(독립 큐레이터, 플로우앤비트), 손희민(시각예술가), 조현지(국립현대미술관). 좌장: 허대찬(앨리스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