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를 보러 배를 탔다. 을숙도 탐방선이었다. 낙동강 하구,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에서 쇠제비갈매기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배에는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생태 해설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같은 황금 주말에 개인적으로는 못 하십니다. 예약하신 분만 탈 수 있어요. 여러분, 오늘 땡 잡으신 거예요.” 문화재 보호구역, 천연기념물, 생물다양성, 그리고 기후변화. 언어는 풍성했다. 하지만 새는 보이지 않았다.
이 장면은 오주영 작가의 〈불가능한 조감도 Re-Imagining Bird’s Eye View〉의 한 부분이다. 새를 보호한다는 제도, 새를 경험한다는 관광, 새를 위한다는 기술. 그 중심에 정작 새는 없다. 이 부재는 새롭지 않다. 조감도(鳥瞰圖)라는 말 안에도 진작에 새는 없었다. 새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시선. 그러나 그 자리에 실제 새의 감각은 남아 있지 않다. 조감도에 남는 것은 새의 몸이 아니라, 세계를 한눈에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선이다.
오주영의 작업은 이 부재에서 시작된다. 기술이 새의 눈을 빌릴 때, 잊힌 목소리를 복원할 때, 감상하고 돌본다고 말할 때, 그 각각의 자리에서 무엇이 사라지는가. 다만 여기서 사라짐은 단순한 배제가 아니다. 때로는 이해된 것처럼 포함되는 방식으로 사라진다. 이 글은 그 사라짐의 방식을 추적한다.
공대 대학원 시절, 그의 연구 과제는 영화를 감상하는 AI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의 시선이 화면 어디로 이동하는지 예측하는 모델의 유사도는 60퍼센트. 그러나 모델이 시선을 따라간다고 해서 그것이 감상이나 정동의 이해를 뜻하지는 않았다. 이 인식을 기반으로 진행한 것이 〈BirthMark〉(2017)였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동명의 소설(1843)에서 과학자 에일머는 아내 조지아나의 뺨에 있는 모반을 제거하려 한다. 그에게 그것은 자연의 결함이다. 조지아나는 남편의 실험 일지에서 실패의 기록을 발견하고, 모반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의 생명도 함께 사라지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침묵 속에서 실험을 받아들인다. 실험은 성공하고, 조지아나는 죽는다.
작품의 AI는 함께 전시에 참여한 작품의 영상을 입력받아 사물을 인식하고, 그 결과를 작가 노트의 텍스트와 매칭했다. 작가 노트 300자 중 AI가 의미 있게 연결한 단어는 두세 개뿐이었다.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AI의 감상이 아니라, 감상이라는 행위가 태그와 텍스트 출력으로 번역되는 장면이었다. 작가는 나중에 고백한다. “AI가 하지 못하는 것을 구태여 구현해 보여주기 위해 밤새워 AI를 만드는 모순을 겪고 있었어요.” AI의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작업에서, 자신도 기술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인식. 이것이 그의 작업 전체의 출발 위치다.
멀티모달 언어 모델이 이미지의 맥락과 뉘앙스까지 언어로 생성하는 것이 지금이다. 이 시점에서 이미지 인식과 맥락 연결에 실패하는 〈BirthMark〉는 시효가 끝난 작업일까. 그렇지 않다. 이 작업은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감상’이라는 행위가 애초에 품고 있는 번역 불가능성을 묻는 작업으로 다시 읽힌다.
오주영은 기술에 반대하는 작가가 아니다. 기술 안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을 동시에 감지하는 작가다. 그는 “같은 자리를 조금씩 다른 주제로 반복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한계가 아니다.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그 자리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2025년 서울시립사진미술관 개관전 《스토리지 스토리》에서 오주영은 〈아우라 복원 지표〉(2025)와 〈기계 감상 시스템〉(2025)을 선보였다. 두 작업은 공식적으로는 별도 작품이지만, 마치 연구실처럼 꾸며진 전시장에서 하나의 유기적인 판단 환경이자 시스템처럼 작동했다. 하나는 소장품의 원본성을 유사성 네트워크로 번역하고, 다른 하나는 관객이 고른 이미지를 그럴듯한 감상 서사로 되돌려준다.
〈아우라 복원 지표〉는 소장품 약 1,300건의 사진을 픽셀 단위로 분석해 유사도 네트워크를 계산했다. 그 결과가 거대한 이미지 지도로 출력되고, 옆에는 복원 과정을 거친 영상이 재생된다. 그런데 복원 영상 안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조선시대의 장면에 라틴인종이 등장하고, 한복 입은 인물이 청재킷을 입고 나타난다. 여기에서 복원은 복구가 아니라 예측이고, 때로는 창안이다. 작품, 즉 이미지 시스템이 진행하는 아우라 복원은 원본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원본성을 계산 가능한 지표로 번역하는 과정이 된다.
〈기계 감상 시스템〉에서 관객은 한쪽 벽면을 차지한 미술관 소장품 이미지 세 장을 골라 데스크에 올리고, 핵폭탄 버튼처럼 생긴 스위치를 누른다. 작품 내 GPT-4가 세 이미지의 배열을 분석해 비평문을 생성하고, 벽면에 프로젝션으로 띄운다. 관객 열 명 중 여덟아홉은 그 비평에 놀라거나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했다. 틀렸다고 항의한 한두 명은 그 작품을 잘 알고있는 관계자였다. 작가는 말한다. “누를수록, 애초에 본인이 들고 왔던 어떤 의미가 없어도 되는데, 거기에 설득되어서 나가게 되는 그 과정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AI의 오류 자체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오류와 비약이 매끄러운 비평문 형식으로 제시될 때, 관객의 사고에 별다른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술이 인간을 탈중심화한다기보다, 인간의 자리를 조용히 대신한다. 기술의 그럴듯함은 실패보다 더 조용하게 작동한다. 그 조용함 속에서 감상의 주체는 흐려진다.

2020년 오주영은 〈문학 챗봇〉(2020)을 만들었다. 저작권이 만료된 한국 문학 데이터로 만든 이 챗봇에는, 나중에 확인해보니 여성 작가가 거의 없었다. 편향이 있는 데이터를 그대로 가져온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2024년 1월, 작가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작가는 이야기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침대 옆에서 원고지를 발견했다고. 할머니는 작가였다. “할머니의 꿈은 뭐였는지를, 끝까지 제가 한 마디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이 발화가 〈문학소녀 AI〉(2024)의 출발점이다.
오주영은 1960~70년대 한국 여학생 문예 자료를 찾아 고서점을 돌고, 문학소녀 연구자 박숙자 교수를 두 차례 만났다. 당시의 소녀 문학은 문학사에서 아류로 취급되었고, 여류 작가라는 분류로 묶인 채 역사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가 소개한 1974년 조선일보 기사는 충격적이었다. 문학소녀 변사체 발견. 담임 교사의 말은 이랬다. “앙드레 지드 따위에 문학을 읽으며 처지를 비관하였으며.”
전시는 장충동 태극당 2층에서 열렸다. 1946년 문을 연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알려진 곳이다. 오주영은 이 공간에 1960~70년대 음악과 골동품 오디오를 채워 넣었다. 매일 오후 2시에는 ‘태극당 AI 리딩 세션’이라는 이름으로 AI가 선별된 문학소녀들의 문장을 낭독했다. 이미 지나간 시절을 붙잡고 있는 공간 위에, 오주영은 또 하나의 재현을 얹었다.

〈문학소녀 AI〉의 챗봇은 여성의 문장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관람객이 ‘안녕하세요’라고 입력해도 응답하지 않는다. 자신의 데이터셋 범위 안에 있는 것만 말한다. 이 침묵은 실패가 아니라 설계된 제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데이터의 결여가 아니라 데이터의 신중함이다. 2020년의 챗봇이 여성 작가들을 몰랐다면, 이번 챗봇은 알되 아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제목에서 ‘문학소녀’가 ‘AI’보다 앞에 놓인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작업의 주어는 AI가 아니라 문학소녀다. AI가 복원할 수 없는 것을 복원하려면, 먼저 인간이 물어보지 못한 자리를 찾아야 한다.
처음에는 이미지가 문제였다. 기계가 이미지를 읽고 인간은 그 감상에 설득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같은 질문은 하늘로 올라간다. 도시의 공중(空中)은 더 이상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드론과 물류, 생태 관리가 겹치는 인프라로 계산된다. 그리고 공중(公衆), 즉 그 공간을 둘러싼 공공성 역시 재편된다. 새는 하늘의 오래된 거주자이면서도 그 미래를 결정하는 공중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서울시가 2024년 도심항공교통(UAM, Urban Air Mobility) 체계, 이른바 드론택시 계획을 발표했을 때, 오주영은 그 경로가 한강 습지구역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시는 “도심 내 장애물이 적고 안전성이 높다”는 말로 한강을 선택했다. 그 설명 안에서 한강은 비어 있는 공간이 된다. 그러나 그 습지에는 이미 새들이 살고 있었다. 작가의 조사로 찾아낸 통계인 연간 조류 충돌 사망은 약 800만 마리. 하지만 이 숫자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황조롱이 드론〉(2022)은 이 맥락에서 출발한다. 작품에서는 황조롱이를 모방한 생체모방 AI 드론이 도시 텃새의 길잡이로 시뮬레이션된다. 작품의 공적 언어는 새가 드론 기술의 최전선 사용자가 되어 인간과 항로를 공유하는 사변적 시나리오다. 파리8대학의 디지털 인문학과 교수 에베라르도 레예스는 이 작업을 인간중심 기술의 탈중심화로 읽는다. 유효한 독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붙잡고 싶은 것은, 그 탈중심화가 공존의 낙관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지점이다. 레예스는 이 작업을 종간 커뮤니케이션과 다종 공생의 가능성으로 읽는다.
그러나 작가 토크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자리에 있었다. “이 친구는 사실 제가 만든 악몽 같은 앤데, 자꾸 오독이 되는 거예요.” “저는 여기에 희망이 없어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의 절망스러운 실현물 같은 거예요.” 실제 시나리오는, 맹금류 경고음을 내는 드론이 드론택시의 항로 안에서 새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 간극은 레예스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황조롱이 드론〉이 얼마나 쉽게 공존의 언어로 읽히는지를 보여준다. 새의 시선을 되찾아주겠다는 상상력 안에도 새는 없다. 그 자리에는 경로 계산과 충돌 회피의 효율이 있을 뿐이다.
을숙도의 문화재 보호구역 안에서 에코관광이 진행되던 그 장면에서, 작가는 다크 투어를 기획했지만 허가받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시작된 것이 〈유조키움센터〉(2023)와 〈불가능한 조감도〉(2024)이다. 당시 오주영은 지자체가 운영하는 우리동네키움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키움’이라는 말이 작품 제목에 들어왔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관계와 피로, 책임과 시간이 얽혀 있다. 그러나 〈유조키움센터〉의 드론새가 하는 키움은 감지, 선별, 훈련, 적응 프로토콜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황조롱이 드론이 쇠제비갈매기에게 인간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도시화의 승자가 패자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구조다.
ARTIST EXHIBITION TOUR – IBK 아트스테이션 2025 Vol 3. 오주영 [공존 : AI돌봄센터]
〈유조키움센터〉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드론이 데이터를 잘못 학습해, 쇠제비갈매기를 모두 물어죽인다. 전시 팸플릿의 제목은 ‘드론새 멸종 선언식’이었다. 자연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작동해온 기술적 욕망의 장례식이다. 여기에서 돌봄은 따뜻한 윤리가 아니다. 선별, 훈련, 감지, 적응 관리의 이름으로 조직되는 통치 기술이다. 그 시스템 안에서 새는 데이터, 행동 패턴, 위험 관리 대상으로 번역된다. 프로토콜에 오류가 생겼을 때, 돌봄받던 존재는 죽는다. 조감도는 새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고 말하지만 그 안에 새의 감각은 없고, 기술은 새를 돌본다고 말하지만 그 돌봄 안에서 새는 항로의 변수, 충돌의 위험 요인, 시스템의 관리 대상이 된다. 돌봄은 관계가 아니라 프로토콜이 된다.
AI의 감상은 감상을 대신하며 인간을 설득했고, 문학소녀의 데이터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황조롱이 드론은 공존의 이미지로 읽히는 동시에 새를 쫓아내는 장치였고, 유조키움센터의 돌봄은 프로토콜의 오류 속에서 죽음으로 끝났다. 이 모든 자리에서 기술은 선의의 언어를 빌려 작동했다. 이 언어는 오늘날 LLM과 에이전트를 둘러싼 말들과도 겹친다. 기술이 인간의 행위를 닮은 이름을 얻는 순간, 우리는 그 행위가 어떤 절차로 번역되었는지 묻지 않게 된다. 이해는 맥락 처리로, 감상은 문장 생성으로, 돌봄은 관리 프로토콜로 바뀐다. 오주영의 작업은 그 번역의 순간을 붙잡는다.
작가가 “같은 자리를 반복하는 것 같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정확한 자기 인식이다.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반복된다. 기술이 이해한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이해받지 못한 것들이 매번 나타난다. 을숙도에서 새를 보러 갔지만 새는 없었다. 조감도라는 말 안에도 새는 없었다. 오주영의 작업은 이 부재를 고발하거나 애도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부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기술이 어떤 언어를 빌렸는지를 드러낸다. 복원은 복구가 아니라 예측이고 창안이며, 드론은 새의 시선이 아니라 새를 비운 인간의 계산이고, 챗봇은 잊힌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의 부재를 가시화하는 장치다.
그의 작업은 기술 이후의 희망을 말하기보다, 기술이 희망처럼 말해질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들을 묻는다. 그 물음이 계속되는 한, 새가 없는 새의 눈은 새의 시선을 회복하지 못한 채, 우리가 무엇을 보았다고 믿었는지를 계속 되묻게 만들 것이다.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aliceon.co.kr 편집장
이 글은 2026 AT&D School '관계로서의 기술 / Technology as Relation' 프로그램의
오주영 작가 토크(2026. 6. 25) 및 비평수업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