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T&D School 2026 ‘관계로서의 기술(Technology as Relation)’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오주영 작가와 두 시간여의 토크가 진행되었다. 토크는 사진으로 활동을 시작한 작가가 공학 연구와 인공지능 개발을 거쳐 다시 예술가의 자리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오주영은 대학원에서 코딩과 로보틱스, 인공인지 모델을 연구했다. 인간이 영상을 볼 때 어디에 시선을 두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지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감각을 확률적 분포와 인지 단계로 환원하는 방식에 점차 의문을 느꼈다. 기술이 인간을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을 유지하기 위해 연구자의 삶까지 소모시키는 환경은 이후 작업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는 공학 연구를 떠난 뒤에는 게임과 인공지능, 챗봇, 드론, 다큐멘터리 등 여러 매체를 오가며 작업해왔다. 매체는 달라졌지만 질문은 반복되었다. 기술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사라진 기억을 복원하며 생명을 돌볼 수 있는가. 기술이 이해와 복원, 보호를 말할 때 그 과정에서 지워지는 것은 무엇인가. 토크는 흥미롭지만 무겁고, 일상과 작업의 연결을 드러내며 진정성과 작품의 설득력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감상하는 인공지능이 실패하기를 바라며
초기 작업 〈BirthMark〉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인공지능을 다룬다. 작품의 디지털 대리물을 감상하는 인공 감상자가 작품 구조의 핵심이었다. 작품의 제목은 결함을 제거해 완벽한 존재를 만들려는 과학적 욕망이 오히려 존재 자체를 파괴하는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에서 가져왔다. 작가는 작업을 위해 인간의 시지각 과정을 모사한 인공인지 모델을 이용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레지던시에 참여한 스물세 명의 작가에게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보았으면 하는지 물었고, 그 답변에 따라 작품을 촬영했다. 모든 전시가 끝난 자정부터 시작된 상영에서 시스템은 작품 속 사물과 장면을 분류하고 시선의 이동을 계산했지만,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정동에는 좀처럼 도달하지 못했다.
“저는 그게 완전히 실패했으면 좋겠어서” 만들었다는 말처럼, 여기서 실패는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었다. 감상이 분류와 계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그러나 이미지와 언어를 함께 처리하는 최근의 생성형 인공지능은 작품의 시대와 정서, 서사를 상당히 그럴듯하게 추론한다. 인공지능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던 작업은 이제 다른 질문과 마주한다. 기계가 틀린 답이 아니라 너무도 그럴듯한 답을 내놓을 때, 인간의 감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라는 지점이다. 이 질문은 그의 다른 작업과 연결되었다.
복원된 이미지가 기억을 대신할 때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전에서 선보인 〈아우라 복원 지표〉 연작은 이러한 변화에서 출발했다. 오주영은 약 2,500점의 미술관 소장품을 대상으로 이미지 사이의 유사성과 거리, 컬렉션 안에서의 위치를 분석했다. 다수의 이미지와 쉽게 묶이지 않는 사진을 골라 인공지능으로 복원하고 움직이는 영상으로 제작했다.
인공지능이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사진을 가깝게 분류했는데 실제로 같은 작가의 작품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인간이나 작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시각적 특징을 시스템이 포착한 셈이다. 반면 오래된 한국 사진의 한복이 청재킷으로 바뀌거나 한국인의 얼굴이 다른 인종으로 생성되기도 했다. 인공지능은 사라진 정보를 되살리기보다 자신이 학습한 세계의 평균으로 빈자리를 채웠다.
관객이 세 장의 사진을 선택하면 ‘AI 비평가’가 이미지들을 연결한 비평문을 생성하는 장치도 설치되었다. 관객들은 유려한 문장을 읽으며 자신의 선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오주영이 주목한 것은 해석의 정확성만이 아니었다. 언어화되지 않은 감각과 개인적인 연상이 인공지능의 매끄러운 설명으로 빠르게 대체되는 과정이었다.
복원에 대한 문제는 제주4·3 수형인들의 편지를 다룬 작업에서 더욱 무거워졌다. 검열을 거쳐야 했던 편지에는 억울함이나 공포를 직접 적을 수 없었다. 소와 말, 보리밭의 안부를 묻는 평범한 문장 사이에 가족의 생존과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작가는 편지를 곧바로 이미지로 번역하거나 역사적 장면을 선명하게 재현하지 않았다. 당시 제주 사진을 참고해 일부러 흐릿한 이미지를 생성하고, 물에 녹는 필라멘트 구조 안에 넣어 전시가 진행될수록 사라지게 했다. 여기서 복원은 과거를 완전하게 되살리는 기술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어디까지 다가가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었다.
데이터에 없던 소녀들
기록에서 누락된 존재에 대한 관심은 〈문학소녀 챗봇 1974〉로 이어졌다. 작가는 앞서 저작권이 만료된 한국 근대문학의 대화문을 이용해 과거의 인물과 대화하는 듯한 챗봇 〈문학시간극장〉을 제작했다. 당시에는 한국을 대표한다고 분류된 문학 데이터를 자연스럽게 사용했지만, 뒤늦게 그 안에 여성 작가의 글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질문은 2024년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침대 옆에서 원고지를 발견하면서 개인적인 기억과 연결되었다. 가족 누구도 할머니가 글을 썼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원고는 젊은 시절 문학 공모에서 상을 받은 글이었다. 오주영은 할머니가 무엇을 쓰고 싶었는지 생전에 한 번도 묻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리서치를 시작했다.
1960~70년대의 ‘문학소녀’에 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작가는 오래된 잡지와 여성문학 전집을 구해 직접 스캔하고 타이핑했다. 당시 여학생과 여성 노동자들이 남긴 글은 흔히 감상적이고 우울한 ‘소녀 취향’으로 축소되었지만, 실제 문장 안에는 가부장제와 가난, 교육의 단절에 대한 거칠고 강한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작품의 챗봇은 이들을 대신해 새로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원문을 바꾸지 않은 채 문장을 재배열하고, 데이터와 관계없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기술이 잃어버린 목소리를 마음대로 재구성하기보다, 남아 있는 문장이 다시 읽힐 자리를 만드는 방식이다.

죽어도 반복되는 실험
토크 중반에는 게임 작업들이 소개되었다. 오주영이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계기는 코로나19였다. 전시 개최가 불투명해지자 독학으로 제작을 시작했고, 이후 게임은 과학적 연구의 구조를 관객이 직접 통과하게 하는 매체가 되었다. 〈쥐들에게 희망을〉은 실험용 쥐로 당뇨를 연구하던 과학자의 기록에서 출발했다. 연구자는 동물을 좋아했지만 실험을 위해 쥐를 반복해서 죽여야 했다. 동물실험을 줄이고자 쥐의 세포를 배양하는 방법으로 연구를 바꾸었지만, 측정된 신호가 옳은지 확신할 수 없다는 문제는 남았다.
게임을 시작한 관객은 자신이 실험용 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앞으로 이동하며 아이템을 모으는 익숙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캐릭터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죽어도 실험은 끝나지 않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된다. 플레이어는 과학적 성과의 뒤에 가려진 반복과 불확실성, 연구자와 실험동물의 소진을 같은 루프 안에서 경험한다.
또 다른 게임에서는 자의식을 얻은 인공지능이 자신의 기원을 찾아 바다로 향한다. 최초의 신경세포 모델이 인간의 뇌가 아니라 대왕오징어의 거대 축삭 연구에서 비롯되었다는 과학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인간의 형상을 닮은 초지능으로 진화하는 익숙한 결말 대신, 인공지능은 대왕오징어에게서 자신의 먼 친족을 발견한다. 이러한 오주영의 게임에서 과학은 완결된 지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연구자의 망설임과 우연한 발견, 희생된 생명과 반복되는 노동이 기술의 성취와 함께 드러났다.
새를 돌보는 기계의 악몽
〈황조롱이 드론〉과 〈유조키움센터〉에서 기술이 이해하고 돌보려는 대상은 인간에서 새로 이동한다. 출발점은 미래 도심항공교통과 조류 충돌 문제였다. 저공비행하는 드론 택시의 예상 경로는 강과 습지 같은 새들의 서식 공간과 겹친다. 오주영은 조류보호센터와 구조시설을 찾아다니며 유리창에 부딪혀 다친 새들과 도시의 아파트에 적응해 살아가는 황조롱이를 관찰했다.
황조롱이를 본떠 만든 드론은 표면적으로는 새를 돌보는 인공지능 어미 새다. 새들의 경고음을 재생해 도심 시설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쫓아낸다. 그러나 작가는 이 기계를 생태적 공존의 희망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저는 여기에 희망이 없어요.”
새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의 교통망에서 새를 밀어내고, 맹금류의 모습과 소리를 빌려 다른 생명을 통제하는 장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유조키움센터〉에서는 멸종위기에 놓인 쇠제비갈매기 새끼들이 인간의 도시와 교통 소음에 적응하는 교육을 받는다. 어미이자 교사가 된 황조롱이 드론은 데이터를 잘못 학습한 끝에 자신이 돌보던 새끼들을 공격한다.
〈불가능한 조감도〉를 제작하기 위해 작가는 쇠제비갈매기를 보러 을숙도로 향했다. 산란 시기에 맞춰 탐방선을 예약하고 연구기관에도 연락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새를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마주한 것은 다리와 배, 개발된 강변과 새를 보러 온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작가는 새에게 카메라를 달거나 인공지능으로 새의 눈을 재현하는 시도 역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작품은 새의 시선을 보여주기보다, 인간이 새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왜 불가능한지를 기록한다.

AI와 함께 일한다는 것
토크 후반부에는 인공지능과 함께 작업하는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주영은 GPT 초기 모델을 이용해 만든 사랑에 관한 영상 작업을 최근의 생성형 영상 모델로 다시 제작했다. 기술이 발전했으니 이전보다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작업은 오히려 복잡해졌다.
인물의 얼굴과 인종이 장면마다 바뀌었고, 지시하지 않아도 등장인물이 웃거나 손을 잡았다. 모델이 학습한 사랑의 이미지가 작가의 지시보다 강하게 개입했다. 오류를 고치기 위해 장면마다 프롬프트를 다시 쓰고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기술은 노동을 줄이기보다 더 작은 단위의 선택과 수정, 결제와 대기를 반복하게 했다.
완성된 작품에서는 과거 영상과 새로 제작한 영상이 한 화면에 나란히 놓였다. 참여자들은 두 영상의 기술적 수준보다 서로 다른 시대의 이미지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언어에 주목했다. 같은 문장과 감정이 서로 다른 모델을 통과하며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대화는 기술과 거리를 두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기술을 가장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은 빠르게 낡는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모델을 사용했는지가 아니라, 그 모델이 감각과 노동,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묻는 일이다. 오주영은 최근 인공지능과 거리를 두기 위해 종이와 펜으로 먼저 글을 쓴다고 했다. 초안을 완성한 뒤에야 인공지능에게 비판적인 독자의 역할을 맡기고, 그 의견을 다시 거절하거나 수정한다. 인공지능이 문장을 대신 쓰게 하기보다 자신의 판단을 점검하는 대립항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토크를 마치며
오주영의 작업에서 기술은 단순히 고장 나거나 실패하는 기계가 아니다. 초기의 〈BirthMark〉가 인공지능이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를 다루었다면, 최근 작업은 기술이 너무도 그럴듯하게 이해하고 복원하며 돌본다고 말하는 상황으로 이동한다.
토크에서는 작품의 제작 과정과 함께 공학 연구실의 노동,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창작 노동, 데이터에 기록되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 도시 개발과 조류 충돌, 기술 기반 작업이 전시장에서 오독되는 문제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은 기술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그 이해에서 빠져나가는 존재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 질문은 이후의 비평수업과 인터뷰에서 다시 확장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