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oquium] 탐정의 시간, 무당의 시간: 정여름의 추적술과 미래이후연구소의 첫 발걸음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상영과 발표에 이어 진행된 Q&A 현장. 정여름 작가와 오영진 교수가 나란히 앉아 관객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배경 스크린에는 행사 포스터 이미지와 함께 자유의 여신상이 투영되어 있다. 미군기지, 증강현실, 미국적 상징이 한 프레임 안에 겹쳐진 이 장면은 〈그라이아이〉가 열어놓은 질문들이 대화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담고 있다. 서울과기대 미래이후연구소 콜로키움 시리즈 「미래 이후 얽힘, 실험」의 첫 번째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정여름(왼쪽), 오영진(오른쪽), 「미래 이후 얽힘, 실험1」 Q&A 현장, 서울과학기술대학교 ST아트홀, 2026. ©허대찬

4월 30일 저녁,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도서관 1층 ST아트홀. 서울 도심의 봄 저녁 공기를 가르고 들어선 자리는 작지만 밀도가 높았다. 이번 행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미래이후연구소가 새로 시작하는 콜로키움 시리즈 「미래 이후 얽힘, 실험」의 첫 번째 프로그램이었다. 주제는 ‘전쟁을 추적하는 예술가: AI, 구글어스, 딥페이크로 읽는 전장’. 제목부터 단도직입적이었다.

먼저 33분짜리 영화가 상영되었다.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이었다. 어둠 속에서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그 33분은 단순한 상영 시간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스크린은 사건을 재현하는 평평한 표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호들이 교차하는 얇은 막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이미지, 위치정보, 군사기지, 온라인 푸티지, 기억의 파편, 그리고 언어가 서로를 통과하며 흔들리는 감각이 남았다. 이어진 작가의 발표와 오영진 교수와의 대화, 관객과의 토크는 작품을 설명하는 시간이기보다 작품이 열어놓은 감각을 더 깊숙이 밀고 들어가는 시간에 가까웠다. 이 글은 그 감각의 기록이다.

작품 서두에 등장하는 외눈 자유의 여신상. 그리스 신화의 그라이아이는 세 자매가 눈 하나를 공유하며 번갈아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들이다. 정여름은 이 신화적 이미지를 미군 주둔이라는 현실 위에 포개며,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가시성과 은폐 사이의 긴장을 작품의 첫 장면으로 선언한다. 하나의 눈으로 세계를 감시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그 시선 자체가 불완전하고 편파적임을 드러내는 형상이다. 오른편 텍스트에 부분적으로 보이는 “stationed”와 “dea”는 작품의 부제 “주둔하는 신(Stationed Deity)”의 파편들이다. 정여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스틸 이미지. ©정여름

정여름은 객석 질문에 답하며 자신이 “기술을 중심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오히려 그의 작업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기술을 특별한 장비나 새로운 매체로 다루기보다, 기술이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는 작가에 가깝다. 지도 앱, 위치정보, 드론 소리, 온라인 푸티지, 군사기지 주변의 동선, 방위산업 전시회의 홍보 언어. 그런 것들은 따로 “기술”이라고 불리지 않은 채 우리의 생활을 구성한다.

그는 방위산업 전시회에 자주 간다고 했다. 거기서 무엇이 유행하는지 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탄피 이야기를 꺼냈다. 박람회 부스에서 “비건이다”, “친환경이다”라는 식의 홍보 문구가 붙은 탄피였다. 마그네슘으로 만들어져 몸 안에서 터지고, 탄피 자체가 남지 않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설명. 그것이 친환경이라는 논리. 찰과상, 흔적, 친환경. 이 단어들이 같은 문장 안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괴했다.

이것은 단순한 자본주의적 언어 오염의 사례가 아니다. 정여름이 〈그라이아이〉에서 집요하게 추적했던 감각이 현실의 언어 속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장면이다. 같은 신호가 일상과 전쟁을 동시에 집행한다. GPS가 지도 서비스와 배달 앱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군사 작전과 정밀 타격의 조건이 되듯, “친환경”이라는 말은 재활용 용기를 가리키기도 하고, 인체 안에서 사라져 흔적을 남기지 않는 탄피의 홍보 문구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내가 작업자로서 생태에 대해 말하고 환경에 대해 말할 때, 저 탄피가 남지 않는 것보다 더 강하게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날의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정여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2020) 스틸 이미지. 포켓몬고 인터페이스 속 윌로우 박사의 등장 장면. 게임의 안내자로 설정된 이 캐릭터는 작품 안에서 접근이 차단된 공간으로 이끄는 또 다른 안내자로 재문맥화된다. ©정여름, 이미지 출처: 서울독립영화제(siff.kr)

정여름은 2018년 말부터 2023년까지 용산에 살았다고 했다. 미군기지 담장이 가까운 동네였다. 작업의 한 출발점이 된 것은 어느 밤의 소리였다. 미국 독립기념일, 기지 너머에서 크게 들려온 폭죽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깼다. 밖에 나가보니 한 아이가 아버지 품에 안겨 불꽃놀이를 보고 있었고, 아이는 “전쟁 난 줄 알았어”라고 말했다. 기지가 있다는 사실과 전쟁이라는 현실을 한 번도 연결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 처음으로 연결이 이루어졌다고 그는 회고했다. 오영진은 이 대목을 두고 “탐정의 시간 이상으로 무당의 시간”이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우연한 순간에 필연이 터지는 것. 누구에게나 들릴 수 있는 폭죽 소리에서 누군가는 단지 축제를 듣고, 누군가는 전쟁의 잔향을 듣는다. 그 차이는 정보량의 차이가 아니라 감각의 차이다.

정여름은 용산 해방촌에 살던 시기, 자신의 지도 앱이 국방부 안을 도는 것으로 표시되었고, 친구의 휴대폰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것이 정확히 스푸핑(Spoofing)이었는지, 재밍(Jamming)이었는지, 다른 형태의 위치정보 교란이었는지는 단정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상 징후가 이미 일상 속에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것을 공포스럽게 느꼈고, 그런 현상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인터넷과 GPS는 오늘날 세계를 감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술 레이어를 담당하고있다. 인터넷이 세계의 사건과 사물과 이미지를 검색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면, GPS는 그 세계 안에서 나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계산한다. 그러므로 위치정보의 교란은 단순히 내 휴대폰이 잘못 작동하는 사건이 아니다. 내가 세계 안에 놓이는 방식, 나의 몸과 국가적 경계와 군사적 권력이 서로 접속되는 방식이 잠시 노출되는 순간이다.

〈그라이아이〉에서 포켓몬고(Pokémon GO, Niantic, Inc., 2016)는 단순한 게임적 소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장소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특정 지점을 포켓스탑이라는 게임의 표식으로 다시 부르는 위치 기반 시스템이다. 정여름은 이 게임의 표식과 구글어스의 위성 이미지, 군사기지 주변의 지워진 장소들, 추모비와 ATM 같은 이상한 잔여물들을 따라가며 하나의 도시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고, 지워지고, 다시 호출되는지를 추적한다. 게임의 지도 위에 놓인 작은 아이콘은 가벼운 놀이의 기호처럼 보이지만, 작품 안에서는 군사적 기억과 도시의 지리, 식민과 냉전의 흔적을 호출하는 단서가 된다.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입구가 여기에 있다. 정여름의 작업은 전쟁의 이미지를 하나의 사건 표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믿어지는 조건으로 들어가 그것을 다시 영상으로 돌려놓는다. 작가는 이를 “표상에서 작동으로, 다시 표상으로 이동하는 왕복 운동”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전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보이게 하고 가리게 하며 믿게 만드는 조건을 다시 감각하게 하는 일. 〈그라이아이〉의 힘은 그 왕복 운동에서 나온다.

플럭서스(Fluxus)의 핵심 멤버이자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가 소니 포타팩을 들고 있다. 1967년 포타팩의 등장은 영상 기록과 재생의 권한을 방송국 바깥의 개인에게 처음으로 열어주었다. 두 사람은 이 장치를 단순한 기록 도구가 아니라 제도적 시각 질서에 개입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로 주로 호명된 백남준과 달리, 구보타는 오랫동안 그 이름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포타팩을 두고 “새로운 붓”이라고 불렀다. Shigeko Kubota and Nam June Paik, Westbeth Studio, 1974. ©Tom Haar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비디오아트와 미디어아트의 오래된 출발점이 떠올랐다. 1967년 소니가 출시한 포타팩(Portapak)은 영상 촬영과 재생의 권한을 방송국 바깥으로 확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백남준, 바슐카 부부(Woody & Steina Vasulka), 조안 조나스(Joan Jonas)같은 작가들이 비디오 장비를 사용한 것은 기록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텔레비전의 일방향성, 방송 이미지의 권위, 제도화된 시각 질서에 개입하기 위해서였다. 포타팩 세대가 이미지 생산의 권한을 개인의 손에 쥐여주면서 제도적 시각 질서에 개입하고, 사회에서 감추어지거나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실천의 가능성을 열었다면, 정여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세계를 지우는가”를 묻는다. 드러내기를 넘어서 드러냄의 조건 자체를 드러내기. 그의 작업은 그 계보 위에 있으면서도 다른 시대의 조건을 통과한다.

정여름은 추리소설 독자라고 했다. 특히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Thornton Chandler)를 좋아한다고. 그는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의 필립 말로를 떠올리며, 사건과 사건 사이의 공허, 사건들을 잇는 여백에 시선을 보내는 일이 중요하게 다가왔다고 설명했다. 오영진이 말한 탐정의 시간은 여기서 더 선명해진다. 탐정은 이미 승인된 증거만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다. 이상하고 남겨진 단서들,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먼 촌수의 것들을 연결하는 사람이다. 정여름은 가자지구에서 올라오는 스냅샷과 언론사가 폭격 장면을 찍기 위해 띄운 드론 영상 등을 오랜 시간 따라보며 “무엇을 더 볼 수 없는가”와 “무엇을 그렇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가”를 동시에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맥락에서 정여름이 스스로 사용한 단어는 “밀렵꾼”이이었다. 이 말은 작가의 행위를 범죄화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다. 무엇이 합법적인 시야이고, 누가 볼 권리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열기 위한 말이다. 그의 작업은 공식적으로 승인된 정보의 통로만을 따르지 않는다. 군사기지 주변을 걷고, 방위산업 전시회를 들여다보고, 온라인에 흩어진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지도와 위치정보의 흔들림을 기억한다.

그 움직임은 작업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정여름은 방위산업 전시회 앞에서 시위를 했고, 이후 안으로 들어가 무기들을 기록해 집회 동료들과 나누었다고 말했다. 용산에 살 때는 “관타나모”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경찰이 막은 경험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을 작업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그냥 그게 제 삶에서 되게 중요한 행동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작업과 삶이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각자의 층위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뜻에 가까웠다. 그는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무용함을 알면서도 어떤 장소와 현상과 감각을 계속 가리킨다.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가리키는 사람의 단단함이었다.

오영진 교수의 발표 장면. 그는 바이브 코딩으로 직접 제작한 인터페이스를 사용해 발표를 진행했다. 마우스 커서가 위치하는 곳에만 서치라이트처럼 화면이 열리며 정보가 노출되는 방식으로, 나머지 영역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 화면에는 “CASE FILES”라는 제목 아래 포켓몬고와 구글어스를 디지털 도구로, 용산 미군기지와 캠프롱(원주)을 물리적 장소로 연결하는 구조가 담겨 있다. 발표 형식 자체가 탐정의 수사 파일을 열어가는 행위를 닮아 있었다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커서로 오가는 몸짓이, 정여름의 작업이 다루는 가시성의 문제를 고스란히 반복했다. 오영진, 「미래 이후 얽힘, 실험1」 발표 현장, 서울과학기술대학교 ST아트홀, 2026. ©허대찬

정여름은 동두천에서 이주민 어린이들을 교육하던 시기의 경험도 공유했다. 학교 근처까지 드론이 날아와 빙빙거리며 소리를 냈고, 시끄럽지 않냐고 묻자 아이는 익숙하다고 답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드론이 어디쯤 지나가는지 알 수 있다고. 그 말에 작가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눈을 감고도 드론의 궤적을 감각하는 신체. 전쟁 효과가 신체에 내면화된 상태다. 자리에 함께 한 이영준 교수가 말했듯, 전쟁은 무언가가 터지고 부서져야만 전쟁이 아니다. 미군기지가 용산에 있다는 것, 서울에서 DMZ까지 아주 가깝다는 것,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이미 전쟁 효과일 수 있다.

감각을 되돌리는 것. 이미 익숙해진 것을 다시 낯설게 만드는 것. 정여름의 방식은 이 오래된 예술적 충동과 닿아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가 말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초현실주의가 말한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단순히 사물을 낯선 자리에 놓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익숙한 기술적 장치가 어떤 역사와 권력의 회로 속에서 작동하는지 추적한다. 포켓스탑, 구글어스, GPS, 군사기지, 추모비, ATM, 드론 소리 같은 단서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를 가리키며 연결된다.

이 대목에서 나는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가 사유한 작동적 이미지(operational image)의 문제를 떠올렸다. 재현이 아닌 집행을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 조준하고 추적하고 계산하며, 특정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의 일부가 되는 이미지. 이러한 군사적 표적화와 감시, 자동화된 인식 시스템에서 이미지는 더 이상 인간 관객을 위한 표상에 머물지 않고 작동한다. 정여름의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그 작동적 이미지들을 다시 예술의 이미지로 되돌려놓는다는 점이다. 작동하는 이미지를 스크린 위로 가져와 우리가 그것을 다시 보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작동을 멈춘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관객의 감각 속에서 다시 작동한다.

오늘날 전쟁에서 AI 기반 표적화 시스템과 대규모 감시·정보 데이터의 결합을 둘러싼 보도와 논쟁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정여름의 작업이 요청하는 것은 기술을 악마화하는 일이 아니다. 기술이 어떤 데이터와 판단 구조, 어떤 제도와 언어, 어떤 감각의 익숙함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따라가는 일이다. 그 추적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과 윤리의 문제에 가깝다.

 

작품이 어디에서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판단도 인상적이었다. 〈그라이아이〉는 영화제를 통해 시작했고 영화관 상영을 목표로 만들었다고 했다. 반면 다른 작업들은 전시장에 놓이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기준은 빛이 퍼져도 되는지, 단 한 번의 일방향적 시간을 감당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시점에 들어와도 다시 볼 수 있어야 하는지의 문제였다. 영화관은 관객을 하나의 흐름 속에 앉혀두고, 전시장은 관객이 자신의 시간을 구성하게 만든다. 정여름의 영상은 두 조건 사이에서 전쟁 이미지를 다시 배치한다. 〈그라이아이〉의 전시 버전과 영화 버전이 다른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푸티지의 구입과 사용 조건, 전시와 상영의 제도적 경계가 실제로 작품의 형태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정여름의 작업이 가진 문학성도 빠뜨릴 수 없다. 그의 영상에서 보이스오버는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지를 한 번 더 불안하게 만든다. 작가는 〈그라이아이〉에서 잘 보관된 아카이브 이미지와 브이로그처럼 흘러가는 이미지 사이의 위계를 없애고 싶었다고 말했다. 각 소스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생각했다고. 그래서 그의 보이스오버는 권위 있는 해설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이미지들이 각자 가리키는 방향을 더듬는 문장에 가깝다. 한 사실의 다른 면을 보이게 하고, 서로의 빈틈을 드러낸다. 정여름의 소설이나 에세이가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이 아닌 활자로, 다른 밀도와 속도로 경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오영진 교수가 행사 마지막에 한 말이 계속 맴돈다. 자신 같으면 포켓몬고가 왜 안 되지, 미군이 또 이러고 있네, 정도의 유머나 호기심으로 지나갔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정여름은 그 호기심을 다시 이어 데시벨이 얼마인지, 역사는 무엇인지, 군사적 조건은 어떻게 이어지는지 계속 따라간다고 했다. 그 힘을 작가의 예민함과 명민함이라고 표현했다. 정여름의 예민함은 단지 감수성이 섬세하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가 잠깐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능력이다. 이상한 소리, 이상한 위치, 이상한 홍보 문구, 이상한 평온함 앞에서 멈추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멈춤을 수집과 추적과 기록과 대화와 영상으로 밀고 가는 행동력이다.

미래이후연구소(소장 이광석)는 이 프로그램으로 대외적인 첫 발걸음을 뗐다. ‘미래 이후’라는 이름은 단순한 미래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미래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소진되었거나 왜곡된 시대에, 그 이후를 어떻게 감각하고 사유할 것인가를 묻는 이름에 가깝다. 이 첫 프로그램이 좋았던 이유는 미래 기술의 화려한 가능성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I, 구글어스, 딥페이크(deepfake)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기술적 유행어로 소비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도착해버린 기술들, 너무 익숙해져 더 이상 감각하지 못하는 전쟁의 효과들, 지도와 소리와 이미지의 작은 흔들림을 함께 읽는 자리였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미래이후연구소는 2024년 정식 개소한 인문사회 중심 연구소다. 소장 이광석 교수는 연구소의 목표를 “미래 인간 문명의 중립적 관조”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위기에 개입하는 지적 실천으로 설정한다. 콜로키움, 세미나, 연구 발표, 심포지엄 등 다양한 형식의 학적 모임을 통해 국내외 연구자 네트워크와 연결하고, 인문사회과학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교내 환경을 보완하는 구심점으로 기능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미래 이후 얽힘, 실험1」은 그 첫 번째 대외 프로그램이었다. 미래이후연구소(Post-Future Research Institute) 소장 이광석 교수 인사말. 이미지 출처: 미래이후연구소 공식 웹사이트. ©미래이후연구소 https://futurelab.seoultech.ac.kr/


정여름은 8월 두산갤러리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갤러리의 공식 안내에 따르면 전시는 2026년 8월 26일부터 10월 17일까지 열리며, 난민과 이주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날의 대화가 오래 남은 이유는 전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전쟁을 얼마나 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도 앱의 작은 오류, 드론의 소리, 기지 주변의 이상한 평온함, 친환경이라는 말을 입은 무기,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커진 저화질 이미지들. 정여름의 작업은 이것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묶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이 이미 같은 세계 안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그것은 전쟁을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전쟁을 감각하지 못하게 된 감각을 다시 감각하게 하는 일이다. 탐정의 시간과 무당의 시간 사이 어딘가에서, 정여름의 추적은 계속되고 있다. 그날 이후 내게 남은 질문도 여기에 가까웠다. 예술은 아직, 우리가 익숙해져버린 세계의 어떤 소리를 다시 듣게 할 수 있는가 라는.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aliceon.co.kr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