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와 운동의 역설 : 이이남 Lee LeeNam의 사건들

과거로부터 예술은 일종의 가상적 사건이었다. 동굴 속에 황소를 그려 넣을 때에도 그 황소는 당시 그린 이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이미지로서 기능했고 또한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도 황소는 그저 벽에 그려진 대상을 넘어 실제 황소를 그 장소에 현전시키는 마법과 같은 환영으로 존재했다.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예술이라 규정하는 이유도 그것이 어떠한 사실 자체만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다양한 상상력이 더해진 무한한 사유의 장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에 있어 이미지가 정지해 있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는 요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지의 운동은 사유의 확장을 저해하는 반-사유적 요소로서 취급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초기 영화의 놀라움이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보는 이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눈속임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8폭 병풍>, LED TV 8 piece, 4′ 10″, 2007

이이남은 ‘포스트 백남준’이라 불리우며 대중적인 미디어아트를 선보여 왔다. 그의 작품은 매우 이해하기 쉽다. 고전 명작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움직임을 부여하는 것인데 정지되어 있는 명화의 이미지들은 이이남의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유동적인 무엇이 된다. 즉, 기술 매체를 통해 과거의 명작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때때로 정지되어 있는 스틸 이미지에서 무빙 이미지로, 단색으로 채색된 풍경에서 총 천연색의 빛의 화면으로 재생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움직임은 앞서 제기하였던 정지되어 있는 것들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마법적 기능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움직인다는 사실은 본래의 이미지를 해독하는 이들에게 발생하는 의미적 맥락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을 가능케 했다. 하나의 사건이 단일한 이미지로 설명된다면 결국 그 사건이 지닌 하나의 시점에 속박된 의미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 이미지가 제공하는 상상의 나래는 결국 그 출발점이 되는 이미지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지에 부여된 움직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사건의 주요한 배경들을 이미지 속에 제공했다. 배경은 맥락이 되고 그 맥락은 기존의 제한된 정보 단위들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구성한다. 따라서 예술이라는 사건은 드디어 해석복합체적 요소로서 거듭난다. 우리가 이미지를 보면서 그 움직임의 마법적 기능에 홀리게 될 때, 움직임이라는 요소는 역설적으로 보다 폭 넓은 의미의 해석 세계를 열어주는 셈이다.


<겸제 정선과 세잔>, LED TV, 4′ 20″, 2009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린 2007년작 <8폭 병풍>의 경우, 이러한 그의 특성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원작은 8폭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자연의 다양한 모습들 즉 계절과 시간의 변화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이이남의 작품은 이러한 암시적 요소들을 직접적인 특성으로 변화시킨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과거 예술이 지닌 관조와 침잠이라는 특성에서 관객들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유희적 요소와 참여 그리고 그로부터 제공되는 작품과의 소통이 그것이다. 이제 이미지는 원본과 분리되어 그것의 재현만을 꾀하는 수동적인 상태를 벗어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보다 예술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은 2008년에 제작된 <8폭 병풍 II>에서이다. 그는 드디어 8폭의 풍경을 하나의 연결된 세계로 확장한다. 그는 더 이상 8폭 이라는 미디어의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과거 미디어의 특성을 형식적 인터페이스로 차용하되 내부의 움직임들을 연동시켰다. 따라서 봄과 여름,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4계절과 각 계절에 상응하는 풀벌레와 새의 지저귐이 화면을 관통하여 관객들에게 제시된다.

이이남의 작업은 이러한 측면에서 기술적 신기함을 넘어선다. 기술이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면, 이이남의 작업은 이러한 움직임이 어떠한 측면에서 다른 해석이 가능한지를 잘 드러낸다. 또한 그의 작품은 다른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정지와 운동, 이미지와 무빙 이미지, 디지털과 아날로그, 서양과 동양, 고전과 현대 등의 대비되는 요소들의 충돌이 그것이다. 그는 이미지를 움직이게 만들어 고정된 사유에 역설적 해방을 선물했고 서구의 다빈치와 우리네 김홍도를 공존하게 만들었다. 2009년부터 그는 서구의 작품들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흐의 <자화상>과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등장했으며, 겸제 정선과 세잔의 작품을 혼합시켜 버렸다. 현대 예술이 언제부터인가 대중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복잡한 무엇인가가 되어가려 할 때, 이이남은 재기발랄한 상상을 통해 다시금 대중들들 예술 작품 앞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아니에르의 물놀이 – 시각착오>, LED TV, 3′ 30″, 2010

내부는 디지털 프로세스로 구성되어 있지만 매우 아날로그적 인터페이스를 갖는 것도 그가 중요시하는 대비되는 요소들의 충돌 기법이다. 이는 앞서 백남준으로부터 미디어 아트가 지닌 하나의 형식적 문법으로 고정되어 가는 듯 한데, 이러한 대비가 효과적인 이유는 디지털이 갖는 가벼움을 아날로그가 상쇄시켜 주는 동시에 아날로그의 기능적 한계를 디지털이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2010년작 <아니에르의 물놀이 – 시각착오>의 경우, 조르주 쇠라의 동명의 작품(<아니에르의 물놀이>, 1884)을 변형시킨 것인데, 후기 인상파 작가들이 추구했던 색의 순간적 조합과 우리가 점묘법이라 부르는 형식적 요소들이 디지털 시대의 픽셀라이징 프로세스로 변화한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요소의 변화를 넘어 결국 인상주의자들이 천착했던 시각-시지각의 개념을 소환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시지각적 요소들이 현재의 디지털 환경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두 요소를 병치시키고 있다. 결국 색의 점들은 픽셀들의 조합으로 픽셀들은 확대되어 색 면으로 점차 변화하고 종국에는 하나의 색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그의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은 공존하며 보완하는 이중적 관계로서 거듭난다. 마치 정지된 이미지와 움직이는 영상이 서로에 대한 역설로부터 우리에게 다양한 해석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이러한 작품의 전개들이 결국 스크린이라는 미디어의 틀 안에서의 변화라는 점을 상기해보자면, 이후 진행된 스크린을 벗어나려는 그의 시도들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전개의 수순일지도 모른다. 이이남은 백자 달 항아리로 스크린을 옮겨놓는다. <변용된 달항아리 (나비), 2011>에서 백자의 흰색은 은은한 반영적 표면으로 미디어의 직접성을 서서히 드러나는 이미지들의 반투명성과 함께 간접적 요소로 만들어놓는다. 관객들은 예기치 못한 이미지들이 점차 나타나는 항아리를 보며 백자의 순백색을 이미지를 품은 무한의 공간으로 다시금 인식한다. 그의 전공이 본래 조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는 이러한 실험적 오브제들을 점차 확대하여 사용한다. 2013년작 <테오에게>의 경우, 오래된 타자기와 19인치 투명 모니터를 결합시켰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화면상에 프린트되어 다시 고흐의 자화상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에게 있어 미디어가 단순히 기술적 도구가 아닌 각 시대를 대변하는 메시지의 기능을 담은 ‘의미체’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스도는 왜 TV를 짊어졌는가?, 2014>, CRT Frame, LED TV, 2014

결국, 이이남의 작품은 시대를 대변하는 미디어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예술 작품을 재해석하고, 현재의 요소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미디어의 근본적인 매개 작용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그의 미디어가 스스로의 작품 사이를 연결하는 기능 또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 아닌, 그의 작품 군을 통해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즐거움도 함께 제공한다. 최근 가나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 ‘다시 태어나는 빛’에서 그는 십자가 대신 TV를 짊어진 예수의 이미지를 등장시켰다. 현재의 TV(와 같은 미디어)가 과거의 십자가와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선언하는 듯, 그는 독립된 작품(<그리스도는 왜 TV를 짊어졌는가?, 2014>)에서 등장시킨 주요한 도상을 다른 작품에서도 이야기를 매개하는 알레고리적 요소로서 등장시킨다.(<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2014>) 이와 동시에 그는 미디어가 지닌 매개 작용이 근본적인 의미의 축소와 변형, 증폭과 감소를 내재하고 있음 또한 드러낸다.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진주 귀걸이를 한 할머니 – 눈물, 2014>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 눈물, 2014>는 유리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우리의 시각이 충분히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미디어의 기능과 역할을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인데, 동일하게 미디어에 의해 구성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품 속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와 맥락은 매우 상이하다. 결국 이이남은 미디어를 통해 예술 작품을 재구성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것은 개별적 예술 작품의 재구성이 아닌, 예술이라는 개념에 관한 새로운 접근에 가깝다. 그에게 예술은 무거운 의미 체계에 짓눌려 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의 혹은 잠재적 사건으로 뒤덮여 있는 흥미진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퍼블릭아트. 2015년 5월 기고글 / 이미지출처 : 이이남 작가 홈페이지 (https://www.leenamlee.com)

글. 유원준 (앨리스온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