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심리학자 가에타노 카니자(Geatano Kanizsa)는 1955년 흥미로운 이미지를 선보였다. 카니자의 삼각형(Kanizsa Triangle)이라고 불리는 이 이미지는 집게발 형태의, 마치 팩맨 같은 원형 도형의 배치를 통해 삼각형을 그려낸다. 여기에는 삼각형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인 3개의 선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 꼭짓점을 감싸고 있는 팩맨 도형이 만들어낸 형상 없는 삼각형을 너무나도 명확히 인식 ‘해낸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공백에 대하여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어 그것을 채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멈출 수 없이 자동으로 진행되는 일종의 연상 시스템이다. 해야 한다고 마음먹어야 진행되는 의지의 문제 이전이다. 무언가를 채우는 것, 형상을 만들고 의미를 만드는 것, 즉 상상은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 출신의 다원 예술가인 하비에르 마틴(Javier Martin)의 개인전 《보이지 않는(Blindness)》이 진행 중이다. 이 전시는 독창적인 개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영역을 넘나드는 젊은 작가를 조망하며 생동하는 현대미술의 다원성과 흐름을 조망하는 서울미술관의 보더리스 아티스트 프로젝트(Borderless Artist Project)의 일환이다. 그의 이번 개인전에서는 총 5가지의 작품군이 선보였다. 대표작인 블라인드니스 컬렉션(Blindness Collection)을 비롯, 블라인드니스 위안(Blindness Yuan), 페이머스 컷(Famous Cut) 시리즈와 퍼포먼스 영상 라이즈 앤 라이트(Lies and Light), 그리고 관객참여형 설치작품 블라인드니스 더 다크박스(Blindness the Dark box)가 그것이다.
그는 가리고 덧씌우며 지우는 행위를 통해 만들고 채우려는 인간의 본능을 건드린다. 그의 작업의 시작지점은 사진이다. 이들은 특별한 관심이 없어도 잘 알고 있거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아름다운 패션모델과 영화배우, 작가의 잘 조율된 광고사진과 초상사진이다. 그는 이 사진을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가리거나 덮어씌우고 또는 일부를 제거해 원본 이미지를 변형하며 이를 통해 일종의 맥락의 공백지를 형성한다. 그 결과는 이야기의 생성이며 상상력의 발현이다.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공백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작가가 제안한 게임의 시작이다.
여기 아름다운 여성의 사진이 있다. 그녀의 눈 위로 밝은 네온사인의 선이 가로지른다. 네온의 부드러운 빛은 일차적으로 모델의 눈을 가리지만 가림 이상의 발산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더욱 가까이 끌어들인다. 이 빛의 방출은 얼굴에 어떤 공백을 형성한다. 그런데도 관객은 이 여성에 대한 익숙함에, 그리고 그녀를 가리는 빛에 이끌려 작품 앞으로 다가선다. 다가서며 ‘모델은 누구지’,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이쁘다’ 등의 의문과 감상을 끊임없이 자아내는 중 케이트 모스, 나오미 캠벨, 소피아 로렌과 같은 세계 정상급 수퍼모델의 이름을 뽑아내기도 할 것이다. 점점 근접하며 깨닫는 것은 이 인물사진이 사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매끈해 보이던 사진은 작가의 자취, 즉 사진 외의 콜라주적 요소들로 구별된다. 사진이라 생각했던 작품의 표면은 광택을 띈 인화지가 아니라 캔버스와 나무 같은 비 사진적인 물질이다. 모델의 옷과 배경은 두꺼운 물감으로 덮인 채색 공간이다. 이 불규칙한 콜라주적 평면은 여러 개의 층으로 구성된 입체로서 재인식된다.
이제 관객은 새로운 의문을 가진다. 패션 사진에 대한 정의, 그리고 작품을 받아들인 자신의 인식에 대한 질문이다. 신체적 아름다움의 전문가인 패션모델이 자아내는 표정과 눈빛, 포즈, 몸매와 비율이 어우러진 조형에서 시작하여 각종 옷과 액세서리라는 패션 상품의 조화, 마지막으로 구도와 심도, 조명의 조율로 이어진 완벽하게 완결된 이미지는 미와 표현에 대해 극한에 다다른 결과물 중 하나이다. 이 완결된 결과물은 작가의 손길에 의해 가려지고 변형되어 다른 무언가로 변질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은 다가가며 이를 스스로 파헤치며 분석하고 채워 넣는 과정 중에 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한다.
모델의 눈을 가리는 것에서 시작한 차이는 ‘본다’라는 행위에 관한 물음에 닿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통해 인식하고 분석하며 해석하지만, 모델 개인 스스로가 가진 아름다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설정한 그에 대한 유·무형적 가치, 그리고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가진 의미가 더해진 이미지 위의 이미지는 우리의 이성과 감각을 교란한다. 모델의 눈을 가로지르는 네온의 빛은 그 권위의 은유로서 놓여 있다. 작가의 행위가 드러낸 차이가 무력화 되었음을 깨닫는 경험은 그 권위에 매혹된 우리를 환기하고, 그제야 새로운 발견과 인식이 다시금 채워진다. 작가가 의도한 관객의 승리가 쟁취된 하나의 순간이다.
<블라인드니스 위안(Blindness Yean)>은 또 다른 가려짐의 전술을 취한다. 아름다운 모델이 등장하는 패션 사진의 주인공은 모델 스스로와 그녀가 입고 있는 의류 상품이다. 작가는 이 옷에 중국의 화폐인 위안화와 홍콩달러의 이미지를 덮어씌웠다. 다시금 관객들의 채움 게임이 시작된다. 단색 물감에 의해 가려진 배경과 돈의 이미지로 가려진 의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아름답다. 누군가는 이러한 생소하고 이질적인 매칭에도 불구하고 발현된 아름다움에 대한 의문을, 누군가는 현재의 중국-홍콩의 분쟁과 그 기저의 힘의 논리를 화폐라는 기표를 통해 끌어올릴 것이다. 완결된 원본 광고사진에 새로운 요소를 덮어씌우거나 가리면서 발생한 이미지와 맥락의 단절과 공백은 관객의 추론과 상상에 의해 채워지며 또 다른 완성에 닿는다.
<페이머스 컷(Famous Cut)> 시리즈는 제거의 방법을 택했다. 이 시리즈는 유명인의 초상사진에서 코와 잎, 턱 등의 얼굴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를 제거한 작품들이다. 일부가 조립되어있으나 나머지는 비어있는 퍼즐의 형상임에도 어느 정도 정치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대상이 누구인지 인식해낼 수 있다.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파블로 피카소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명확히 어디서 보았고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명료화를 해내지 못해도 일부를 파악한 순간, 그 인상은 방아쇠가 되어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풍경의 완성에 닿는다. 작품이 펼친 유와 무의 대치와 이미지와 맥락의 결핍에 대해 관람자의 본능이 작동한 결과이다. ‘어, 이게 되네?’라는 채워 넣어 순식간에 완성하는 과정을 깨닫는 순간 닿은 인식은 아름다움이나 돈, 위계에 대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이미지의 수용이라는 현상을 환기하고 그 기저에서 작동하는 논리의 층에 닿을 기회를 열어낸다. 또 다른 얻음의 순간이다.
“재미있었어요.” 전시를 보고 나서의 감상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다. 인상 깊거나 흥미로웠던, 즉 좋았던 전시에 사용하는 상용어이다. 미술에 관련이 있는 전공자이던, 익숙치 않은 일반인이건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재미’는 일상의 ‘반성’과 철학의 ‘반성’이 다르듯 오락이 주는 웃기고 자극적인 감정을 뜻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른 일종의 업계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이다. 오늘의 현대미술에서 언급되는 재미는 어떠한 새롭고 독창적인 개념에 대한 찬미이다.
이러한 재미에는 반드시 관객의 개입이 선행되어야 한다. 항상 새로운 것을 넘어 어렵고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과 전시를 맞이하는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느끼고 찾아내며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승리이다. 독특하고 예상 밖인 개념 발상에 닿아 새로운 사고의 방향을 열고 공감할 때 비로소 재미는 발현된다. 이를 위해서는 오늘날 미술이 가진 정서와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해를 위해 그에 대한 훈련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현대미술이 많은 이들에게 어려운 ‘전장’인 이유이다.
그런 면에서 하비에르 마틴은 영리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중적인 이미지의 차용, 콜라주, 선명한 색 등은 팝아트의 외형과 재현양식에 닿아있다. 이에 관객은 더욱 수월하고 경쾌하게 이 작품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한편 미의 개념과 기준에 대한 문제 제기, 세상의 반영과 비판, 관객과의 소통을 통한 의미생성은 현대 미술의 내재적 지향점에 닿아 있다. 그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팝아트적인 재현양식에서 시작하여 과정으로서 의도적 공백을 만들어 배치했다.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눈을 가리거나 이질적인 요소를 대치 삽입하여 생성하는 맥락적 단절, 물리적인 요소 삭제 등을 통해 관객의 필연적인 개입 방법으로써 해석과 생성을 의도했다. 관객은 그러한 숨김과 덧씌움, 지움의 시각적 장소들을 본능적으로 방문하여 적극적으로 작품과 소통한다. 그리하여 닿는 것은 발견의 연속이다. 작가가 배치한 공백과 어긋남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메꿔가며 관객은 충족감과 더불어 성취감을 얻는다. 이는 작가가 설정한 전술적 승리라고 보아야 한다. 작가가 구성한 전장에서 관객은 틈새 하나하나를 연결하며 표피에서 출발해 작가가 바라보는 내부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간다. 작품은 의도한바 관객에게 정복당한다. 이 정서적 추론 게임은 그 결과가 결정되어있는, 즐겁게 당하는 승리인 것이다.
글. 허대찬 | 앨리스온 편집장
2019.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