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무엇이 되었는가-00: 이미지에 이름을 붙여온 역사

복제 이미지에서 기술 이미지, 작동 이미지, 빈곤한 이미지, 그리고 학습된 이미지까지에의 계보

이미지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사람과 장소, 이미지의 역할은 사건과 사물을 닮은 형태로 옮겨 놓고, 부재하는 것을 눈앞에 다시 불러오는 것이었다. 회화는 대상을 재현했고, 사진은 지나간 순간을 기록했으며, 영화는 움직임과 시간을 보존했다.

하지만 새로운 이미지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이 설명에는 균열이 생겼다. 사진은 원본과 복제본의 구분을 흔들었고, 영화는 지각의 속도와 순서를 다시 조직했다. 컴퓨터 이미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계산해냈으며, 군사·산업·의료 시스템의 이미지는 인간에게 보여주기보다 기계를 움직이고 판단을 실행함에 사용되고있다. 인터넷의 이미지는 손상되고 압축된 채 끝없이 복제되고 있으며, 오늘날 생성형 인공지능은 특정한 장면을 촬영하지 않고도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미지가 달라질 때마다 철학자와 예술가들은 그 변화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복제 이미지’, ‘기술 이미지’, ‘작동 이미지’, ‘빈곤한 이미지’ 같은 표현은 단순한 분류명이 아니다. 그것들은 각 시대의 이미지가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어디에서 이동하며, 누구를 위해 일하고, 어떤 권력과 결합하는지를 포착하려는 비평적 명명이었다. 다만 이 이름들의 지위가 모두 같지는 않다. ‘기술 이미지’나 ‘작동 이미지’처럼 사상가 자신이 명시적으로 제안한 개념이 있는가 하면, ‘복제 이미지’처럼 후대가 그 논의를 소급해 부르는 편집적 명칭도 있다. 이 특집의 마지막에 제안할 ‘학습된 이미지’는 후자의 계보에 스스로를 세운다(또는 세우는 상황에 대한 또 다른 동시대적 명명이다). 새로운 이미지의 이름의 명명은 새로운 시각 체제의 출현을 알리는 진단인 동시에, 이전의 이미지 이론만으로는 더 이상 현재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경고였다고 할 수 있다.

복제되는 이미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복제 이미지 (technische Reproduzierbarkeit / Reproduktion)

발터 벤야민은 1930년대에 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과 영화가 예술작품의 존재 조건을 바꾸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관심은 복제 기술이 원작과 똑같은 사본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작품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이 약해지는 데 있었다.

전통적인 예술작품은 그것이 놓인 장소, 전승의 역사, 의례적 기능과 분리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진과 영화는 작품과 사건을 원래의 장소에서 분리하여 대중 앞으로 이동시켰다. 이미지는 더 이상 관객이 찾아가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객을 찾아오는 것이 되었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쇠퇴’는 단순히 작품의 신비나 품격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지가 유일한 현존에 근거하던 체제에서 대량 복제와 전시, 유통에 근거한 체제로 이동한다는 진단에 가깝다.

복제 이미지는 예술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이전에는 접근할 수 없던 작품과 사건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동일한 기술은 선전과 대중 동원에도 사용될 수 있었다. 이미지의 복제 가능성은 해방과 통제라는 두 방향을 함께 열었다. 그리고 벤야민 이후, 이미지에 관한 질문은 “무엇을 재현하는가”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배포되는가”로 확장된다. 이미지의 의미는 화면 내부에만 있지 않다. 그것이 복제되는 횟수와 속도, 그것을 접하는 관객의 규모와 상황 역시 이미지의 정치성을 구성한다.

관계가 이미지로 매개될 때: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 (spectacle)

벤야민이 기술복제가 예술의 존재 방식을 바꾸는 순간을 포착했다면, 기 드보르는 대량 생산된 이미지가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단계에 주목했다. 그의 대표 저작 『스펙타클의 사회』(La Société du spectacle, 1967)에서 스펙터클은 단지 화려한 시각적 볼거리의 집합이 아니다.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뜻한다. 이때 이미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창이라기보다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대신하는 표면이 된다. 상품, 광고, 뉴스, 영화, 스타와 정치적 선전은 서로 다른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삶을 관람 가능한 대상으로 바꾼다는 공통된 구조를 지닌다. 이때 이미지는 현실의 복제품에 머물지 않는다. 무엇이 현실로 보이고, 무엇이 욕망할 만하며,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인지를 조직한다. 복제의 문제는 이 지점에서 사회적 관계의 문제로 이동한다.

드보르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해 재현과 실재의 관계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인 것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simulacrum) 논의다. 보드리야르에게 이미지는 더 이상 원본을 복제하지 않는다. 시뮬라크르는 흔히 ‘원본 없는 사본’으로 요약되지만, 보드리야르가 겨냥한 것은 사본의 문제가 아니라 모델과 기호가 실재를 선행하고 생산하게 된 시뮬레이션의 체제였다. 원본 없는 사본이 실재를 앞서며, 지도가 영토에 선행한다. 다만 이 글의 관심은 재현의 소멸을 선언하는 데보다 이미지가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엇을 하는지에 있다. 여기서는 복제의 계보 곁에 재현 붕괴의 계보가 나란히 있다는 좌표만 확인해 둔다.

프로그램된 이미지: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기술 이미지 (technisches Bild / technical image)

빌렘 플루서는 사진과 영화, 비디오와 컴퓨터 그래픽을 ‘기술 이미지’라는 범주 안에서 사고했다. 그의 논의에서 기술 이미지는 단순히 기계를 사용해 만든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장치(apparatus)와 프로그램, 과학적 개념과 계산의 결과로 만들어진 이미지다. 전통적인 그림은 인간의 손이 세계를 해석해 표면에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사진은 세계가 카메라 안에 자동으로 찍힌 결과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기술 이미지는 주관적 해석을 거치지 않은 객관적인 기록처럼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플루서에게 카메라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다. 렌즈, 셔터, 필름과 센서, 노출 방식, 제조사의 설계가 촬영 가능한 이미지의 범위를 미리 규정한다. 사진가는 자유롭게 세계를 찍는 동시에 장치에 입력된 가능성 안에서 움직인다.

플루서는 이 구조를 ‘장치’와 ‘프로그램’의 관계로 설명했다. 기술 이미지의 배후에는 그것을 산출하는 장치가 있고, 장치 안에는 무엇을 계산하고 무엇을 허용할지를 정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사진가는 장치를 조작하지만, 장치 역시 사진가의 행위를 조직한다.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와 『기술 이미지의 우주로』에서 플루서는 사진의 출현을 문자 중심 문명에서 프로그램된 이미지 중심 문명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전환으로 보았다.

벤야민에게 핵심 문제가 원본과 복제의 관계였다면, 플루서에게 문제는 이미지의 배후에 있는 프로그램이다. 무엇이 촬영되었는지만 보아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장치가 그 이미지를 가능하게 했으며, 그 장치는 어떤 선택을 허용하고 어떤 가능성을 배제하는지를 함께 읽어야 한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자동 보정, 인물 모드, 얼굴 인식, 야간 촬영 기능은 플루서의 질문을 더욱 직접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사진을 찍지만, 동시에 소프트웨어가 우리가 볼 이미지의 색과 밝기, 초점과 경계를 결정한다. 기술 이미지는 현실의 흔적이면서 장치가 현실을 해석한 결과다.

보는 이미지에서 일하는 이미지로: 하룬 파로키( Harun Farocki)의 작동 이미지 (operational image)

하룬 파로키의 ‘작동 이미지’ 또는 ‘작동하는 이미지’는 이미지 이론의 중심을 한 번 더 이동시켰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넘어 이미지가 무엇을 하는가이다. 그는 2000년대 초 〈눈/기계〉(2001–2003) 연작에서 스마트 폭탄의 유도 화면, 군사 정찰 영상, 산업용 검사 장치와 자동 인식 시스템을 병치했다. 이 이미지들은 전쟁이나 공장 작업을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사일을 목표물로 인도하고, 물체의 위치를 식별하고, 생산품의 결함을 판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파로키는 이처럼 어떤 과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일부로 기능하는 이미지를 작동 이미지라고 불렀다.

작동 이미지 앞에서는 전통적인 감상자의 위치도 불안정해진다. 이 이미지는 반드시 인간에게 보일 필요가 없다. 시스템이 데이터를 입력받고 분류와 추적, 조준과 통제를 수행할 수 있다면 화면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도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볼 수 있는 화면조차 작업자가 시스템을 감독하도록 마련된 부산물에 가깝다.

파로키가 다룬 군사 기술은 곧 산업, 물류, 의료, 교통과 감시 시스템으로 확산되었다. 공장의 머신 비전은 제품을 검사하고, 번호판 인식 카메라는 차량을 분류하며, 의료 영상은 수술 장치의 움직임을 안내한다. 이미지는 세계를 재현하는 표면이 아니라 세계에 개입하는 명령과 판단의 일부가 된다. 〈눈/기계〉 연작이 군사 이미지 기술과 민간 영역의 연결을 추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작동 이미지라는 개념은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를 뒤집는다. 전통적 재현 이미지가 현실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면, 작동 이미지는 현실에서 다음에 일어날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한다. 이미지는 사건 뒤에 남은 기록이 아니라 사건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된다.

이동하며 가난해지는 이미지: 히토 슈타이얼( Hito Steyerl)의 빈곤한 이미지 (poor image)

히토 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는 작동 이미지와 다른 장소에서 출발한다. 파로키가 군사·산업 시스템 내부에서 일하는 이미지를 보았다면, 슈타이얼은 인터넷과 파일 공유망을 떠도는 저해상도 복제 이미지에 주목했다. 빈곤한 이미지는 원본에서 떨어져 나온 사본이다. 여러 차례 복사되고 압축되고 포맷이 바뀌면서 해상도와 색상, 화면비가 손상된다. 영화관과 미술관, 방송국과 공식 아카이브에서 밀려난 이미지가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 이메일, 블로그, 파일 공유 서비스와 소셜미디어를 돌아다닌다. 그는 2009년 《e-flux journal》에 발표한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In Defense of the Poor Image)」에서 이를 ‘움직이는 사본’으로 규정했다. 이미지의 품질은 낮아지지만, 이동 속도와 접근 가능성은 높아진다.

‘빈곤’은 단지 화질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놓인 계급적 위치를 가리킨다. 고해상도 이미지는 저작권과 유통망, 영화관과 미술관, 저장 서버와 자본에 의해 보호된다. 반면 빈곤한 이미지는 공식적 가치를 잃은 대신 복제와 공유를 거듭하며 새로운 관객을 만난다. 여기에는 양가성이 있다. 빈곤한 이미지는 검열과 독점적 유통을 우회하고, 잊힌 영화와 정치적 기록을 다시 공공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다. 동시에 맥락을 잃은 채 소비되고, 플랫폼의 트래픽과 관심 경제를 위해 끊임없이 재활용될 수도 있다. 해방적인 복제와 무분별한 소비는 같은 유통망에서 일어난다.

벤야민이 복제가 이미지의 아우라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물었다면, 슈타이얼은 복제본 사이에도 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모든 복제 이미지가 평등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미지는 고해상도 원본으로 보호되고, 어떤 이미지는 워터마크와 자막, 압축 노이즈를 뒤집어쓴 채 떠돈다. 그러나 빈곤한 이미지는 바로 그 열악함으로 인해 살아남기도 한다. 작고 가벼운 파일은 더 빠르게 국경과 제도를 통과한다. 이미지의 훼손은 소멸의 징후인 동시에 이동의 흔적이다.

인간이 보지 않는 이미지: 트레버 패글런(Trevor Paglen), 그리고 유시 파리카(Jussi Parikka)의 보이지않는 이미지와 인비주얼 (invisible image | invisual)

파로키 이후 작동 이미지의 문제는 머신 비전과 인공지능의 확산 속에서 더욱 커졌다. 트레버 패글런은 2016년 「보이지 않는 이미지(당신의 사진이 당신을 보고 있다) Invisible Images (Your Pictures Are Looking at You)」에서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생산하고 기계가 판독하는 이미지 문화가 성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얼굴 인식 시스템, 자율주행 차량, 위성 분석, 상품 분류와 감시 카메라가 다루는 이미지 가운데 상당수는 인간에게 전시되지 않는다. 이미지는 장치 사이를 오가며 사람과 물체를 분류하고, 접근을 허가하거나 거부하며, 이동 경로와 행동을 결정한다. 패글런에게 이러한 이미지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현실에 더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이 단계에서 이미지 문화와 시각문화는 더 이상 같은 말이 아니다. 이미지가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보이는가가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판독되고 실행되는가이다.

파로키가 만든 이름은 이제 하나의 연구 분야가 되었다. 미디어 이론가 유시 파리카는 『작동 이미지: 시각적인 것에서 인비주얼로 Operational Images From the Visual to the Invisual』(2023)에서 파로키의 용어를 이어받아, 작동 이미지의 계보를 20세기 초의 측정, 항법, 사진측량 기술까지 소급한다. 파리카가 책의 부제에서 전면화한 ‘인비주얼(invisual)’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의 invisible과 다르다.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는 이미지가 아니라, 시각적 표면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데이터·측정·연산을 통해 현실을 포착하고 조직하는 이미지적 작동을 가리킨다. 이미지는 여기서 재현이기 이전에 분석과 포착, 측정과 식별, 추적의 기술이다. 패글런이 고발의 어조로 지목한 상황이 파리카에게는 이미지 이론 전체를 다시 쓰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파로키의 작동 이미지가 인간과 기계의 시선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여주었다면, 패글런의 보이지 않는 이미지와 파리카의 인비주얼은 그 분리가 일상의 기반 시설이 된 상황을 가리킨다.

생성형 AI 이후, 평균 이미지와 학습된 이미지: 슈타이얼과 그 이후 (mean images | learned image?)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 계보에 또 하나의 질문을 더한다. 생성 이미지는 특정한 대상 앞에 카메라를 놓고 얻은 흔적도 아니고, 하나의 원본을 복사한 사본도 아니다. 수많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학습한 모델이 요청에 따라 새로운 화면을 산출한다. 슈타이얼은 이 변화에 ‘평균적 이미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2023년 《뉴레프트리뷰》에 발표한 「평균적 이미지(Mean Images)」에서 그는 머신러닝이 산출하는 화면을 실재하는 대상의 이미지가 아닌 통계적 렌더링으로 규정한다. 사진이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물리적·인과적 연결을 전제로 했다면, 생성 이미지는 학습 데이터에서 구축된 통계적 관계를 바탕으로 화면을 산출한다. 슈타이얼의 표현을 빌리면 이 이미지들은 닮음(likeness)을 그럴듯함(likeliness)으로 대체한다. 영어 단어 mean이 평균과 저열함, 그리고 수단을 동시에 포함하듯, 평균적 이미지는 데이터셋의 한가운데로 수렴하는 규범의 이미지이자 웹에서 무단으로 긁어모은 데이터 체제의 산물이다. 빈곤한 이미지의 이론가가 십여 년 뒤 생성 이미지의 명명자로 돌아온 셈이다.
(「평균적 이미지(Mean Images)」는 그의 책 『Medium Hot: Images in the Age of Heat』(2025)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국내에는 번역되어 『미디엄 핫: 발열 시대의 이미지』(2026)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같은 대상을 산출 과정의 편에서 부를 수도 있다. 이를 잠정적으로 ‘학습된 이미지’라고 불러보자. 여기서 학습되었다는 것은 이미지 자체가 무언가를 배웠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이미지가 거대한 데이터셋과 모델의 계산, 프롬프트와 인터페이스, 플랫폼의 필터를 거쳐 나온 결과라는 뜻이다. 슈타이얼의 평균 이미지가 출력의 통계적 성격을 겨냥한다면, 학습된 이미지는 출력 이전의 배후 과정 전체를 겨냥한다. 학습된 이미지의 배후에는 하나의 촬영 순간보다 이미지 집합이 있다. 특정한 사진가의 시선보다 데이터의 분류와 편향, 모델이 구축한 통계적 관계가 더 큰 역할을 한다. 이미지는 세계의 한 장면을 기록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시각문화의 패턴을 다시 조합한다.

그렇다고 생성 이미지를 이전 이미지들과 완전히 분리된 새로운 종으로 볼 필요는 없다. 생성 이미지는 유통되고 사용되는 조건에 따라 복제 이미지, 기술 이미지, 작동 이미지, 빈곤한 이미지의 여러 층위를 함께 띨 수 있다. 학습 데이터로 복제되고, 프로그램에 의해 산출되며, 추천·광고·감시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압축된 사본으로 순환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교체되지 않고 겹쳐진다

복제 이미지에서 기술 이미지, 작동 이미지와 빈곤한 이미지로 이어지는 흐름은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대체해온 역사가 아니다. 각각의 개념은 이미지에 새롭게 추가된 층위를 보여준다.

벤야민은 이미지의 유일성이 복제와 유통에 의해 어떻게 변하는지를 물었다.
플루서는 이미지의 배후에서 장치와 프로그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물었다.
파로키는 이미지가 현실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작전에 참여하는지를 물었다.
슈타이얼은 이미지의 품질과 가치가 유통 경로에 따라 어떻게 재편되는지를 물었다.
패글런은 인간이 보지 않는 이미지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판단하고 통제하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슈타이얼은 다시, 통계로 산출된 이미지가 닮음 대신 무엇을 보여주는지를 물었다.

이 질문들은 오늘날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얼굴 사진은 복제 가능한 파일이며, 카메라와 소프트웨어가 산출한 기술 이미지다. 얼굴 인식 시스템에 입력되는 순간 작동 이미지가 되고, 메신저와 소셜미디어에서 반복 압축되면 빈곤한 이미지가 된다. 모델의 학습 데이터에 포함된다면 다른 이미지를 생성하는 재료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지금 이미지에 관해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만이 아니다.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질문은 계속 이어질 수 있고 이어져야 한다. 그 이미지는 어떤 장치에서 나왔는가. 어떤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거쳤는가.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잃었는가. 누가 그것을 보고 누가 보지 못하는가. 그 이미지는 어떤 판단과 행동을 실행하는가. 그리고 그 작동의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은 누구인가.

새로운 이미지 개념은 이미지의 외형을 묘사하기 위해 등장하지 않았다. 이미지가 사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바뀌었음을 알리기 위해 등장했다. 이미지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일은 곧 아직 보이지 않는 이미지의 작동을 가시화하는 일이다. 우리는 더 많은 이미지를 보는 시대에 사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지가 인간의 시야에서 벗어나 장치와 플랫폼, 데이터베이스와 모델 안에서 더 많은 일을 수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지를 더 잘 감상하는 법만이 아니다. 이미지를 생산하고 이동시키며 작동시키는 체계를 함께 읽는 법이다. 이 글은 이어지는 연재의 지도다. 앞으로 매주 하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태어난 현장으로 내려가볼 것이다.

허대찬.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 aliceon.co.kr 편집장


더 읽기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최성만 옮김, 길.
기술적 재생산이 예술작품의 현존, 아우라, 전시가치와 대중의 지각을 어떻게 바꾸는지 다룬 이 연재의 출발점이다. 판본과 번역어 차이에 관한 역자 해제도 함께 참고할 수 있다.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유재홍 옮김, 울력.
스펙터클을 단순한 시각적 볼거리가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회적 관계로 규정한다. 복제와 대량 전시의 문제가 사회 전체의 조직 원리로 확대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W. J. 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지의 삶과 사랑』, 김유경 옮김, 그린비, 2010.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넘어 무엇을 원하고 요구하며 어떤 행위성을 갖는지를 묻는다. ‘이미지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일’의 이론적 의미를 확장하는 국문 입문서이다.

Hans Belting, “Image, Medium, Body: A New Approach to Iconology,” Critical Inquiry 31(2), 2005, 302–319. https://doi.org/10.1086/430962
이미지를 독립된 사물이나 화면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매체·신체의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여러 이미지 개념이 차례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 안에 겹쳐진다는 총론의 핵심 논거와 연결된다.

Martin Hand, “Introduction: The Politics and Practices of Computational Seeing,” photographies 16(2), 2023. https://doi.org/10.1080/17540763.2023.2189287
인간이 이미지를 감상하고 해석하는 시각문화에서 장치와 알고리즘이 이미지를 분석하는 계산적 보기로 이동한 동시대 지형을 개괄한다.

Lukas R. A. Wilde, “Generative Imagery as Media Form and Research Field: Introduction to a New Paradigm,” IMAGE 37(1), 2023, 6–33. https://doi.org/10.1453/1614-0885-1-2023-15446
생성 이미지를 하나의 기술적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매체 형식과 연구 영역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이 특집이 마지막에 제안하는 ‘학습된 이미지’가 직접 대화해야 할 선행 논의일 것이다.

최종철, 「세월호의 귀환, 그 이미지가 원하는 것: 미첼의 이미지론을 중심으로」, 『미학예술학연구』 55, 2018, 3–38. https://doi.org/10.17527/JASA.55.0.01
미첼의 이미지론을 세월호 참사의 기억과 애도, 반복적으로 귀환하는 이미지의 정치에 적용한다. 해외 이미지 이론이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사건과 만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박영욱, 「복제를 넘어선 변형가능성으로서의 재생산: 발터 벤야민의 〈재생산기술시대의 예술작품〉을 중심으로」, 『통일인문학』 96, 2023, 143–190. https://doi.org/10.21185/jhu.2023.12.96.143
벤야민의 Reproduktion을 동일한 사본을 만드는 복제에 한정하지 않고 이동과 변형을 포함하는 재생산으로 해석한다. 이 특집에서 사용하는 ‘복제 이미지’가 편집적 명칭이라는 점을 점검하게 하는 국내 중요 연구이다.